프톨레마이오스(Ptolemaeos, AD, 90-168) 이전의 고대 천문학이 형이상학적 논리에 입각한 것이었다면, 프톨레마이오스는 천문 현상을 수리적논증으로 집대성했다는 점에서 고전 천문학의 새로운 경계를 수립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저서 『알마게스트』는 수리적 논증을 통해 지구중심설을 구체화시킨 것으로서, 17세기까지 지구중심설을 견지하고 있던고전 천문학자들의 수리적 해석의 기본서(基本書)가 되었다. 기독교 세계관과 아리스토텔레스 자연철학, 그리고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은 고전천문학계의 삼위일체(三位一體)가 되어 인간중심, 지구중심의 우주론을오랫동안 전개해 갔는데, 이런 결합은 상호 보완적 역할을 착실히 수행하며 신플라톤주의에 영향을 받은 코페르니쿠스가 등장하기 전까지 장기간 성공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은 천체 운동과 관련해 충분하다고 여길 만큼의 합리적인 해석으로 간주되었으므로 비록 몇 가지 모순들을 안고 있긴 했으나, 그 모순들의 원인은 인간 능력의 한계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치부했다. 그로 인해 당시 천문학계는 지구중심설 외에 다른 대안을 전혀 찾지 않고, 오랫동안 지구중심설만을 고수했다. 이런 분위기는 코페르니쿠스의 등장 이후에도 곧장 사라지지 않았는데, 고전 천문학계는 천상계 운동의 부조리를 끝까지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 범주 안에서만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아리스토텔레스 우주론은 나름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의 철학적 표현이었다. 그렇다고 아리스토텔레스 우주론과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이 마냥 조화로운 관계를 유지한 것만은 아니었는데, 르네상스 시대 말까지 아리스토텔레스 우주론은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과 서로 긴장과 견제를 풀지 않으면서 오랫동안 대학 강단에서 논쟁을 벌이며 상호 모순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코페르니쿠스는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제1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지구를 중심으로 천체들이 포함된 천구가 회전한다'고 주장한 것에 대해 '지구가 회전하기보다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 즉 천상계 전체가 회전한다는 것은 확실히 부조리하다'고 단언했다. 그리고 덧붙여 프톨레마이오스가 주장했던 '지구가 하루에 한 바퀴 자전하게 되면 그 속도가 엄청나게 빠를 것이기 때문에, 아마 지구는 오래 전에 산산이 부서져 하늘 너머 먼 곳으로 날아가 버렸을 것이다'라는 내용도 함께 소개하면서 그에 대한 반박으로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천상계는 더 큰 규모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이들이 하루에 한 바퀴씩을 회전하려면 지구가 자전하는 것보다 더 큰 속도로 회전해야 하는데, 그렇다면 하늘의크기는 원심력으로 인해 더욱 더 커져 무한대가 될 것이고, 그 무한대에 가까운 원주를 회전시키려면 회전 속도 역시 무한대로 빨라져야 한다는 모순이 생기는데, 이는 절대 불가하다고 지적하면서 지구의 자전현상은 분명한 사실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한편 태양의 위치에 대한 주제에서도 알마게스트』 제3권은 '태양의운동에 의한 위치 및 각도 변화'에 따른 설명을 통해 태양은 반드시 운동하고 있다고 논증하고 있는 데 반해,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제3권에서는 '태양은 분명 이 세상의 중심이다'라는 논증 결과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가 펼치고 있는 수리적 논증을 반박하기 위해 코페르니쿠스가 사용했던 도구는 결코 새롭게 개발된 것이 아니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제1권 제12장에서 자신의 연구는 거의 대부분이 직선, 원호, 구면삼각형을 통해 논증하게 되는데, 이런 것들은 모두 유클리드(Euclid, BC. 330?-275?)의 기하학을 응용한 것이며, 또 한편으로는 프톨레마이오스가 논증 도구로 삼았던 평면삼각형과 구면삼각형의 현, 변, 각을 다시 적절하게 재再응용한 것임을 뚜렷이 밝히고 있다.
실제 그 당시까지 수학은 근대적 기틀이 잡히지 못한 상태였다. 16세기에 '수학'이라는 학문은 그 지위가 예전보다 많이 승격되었다 할지라도 건축, 공학과 같은 실용적인 측면에서 주로 이용되었을 뿐이며, 그렇지 않은 경우는 수도원에서 4과(산술, 기하, 천문, 음악의 학문적 전통을 유지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게다가 '순수한 수학'이라는 것도 고전 텍스트에 대한 맹목적 몰입과 종교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한 정도의 한정된 수준으로 제한되었다. 이런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태양중심설이 지구중심설을 축출하는 과정에서 '보다 발달된 수학적 도구의 개발'이 필연적 조건으로 작용하지 않았음이 확인된다.
코페르니쿠스 전문가인 오웬 깅그리치(Owen Gingerich)의 계산치에 따르면『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는 1543년에 뉘른베르크에서 초판이 대략 400~500부 정도 인쇄되었다고 추정된다. 그리고 제2판은 1566년에 바젤(Basel)에서 출판되었는데, 어느 정도 수학적 재능이 있는 학자라야만 이해와 분석이 가능했고, 태양중심설에 대한 당시 학계의 반응은 몇몇 학자들을 제외하고는 그리 호의적이지도 않았기 때문에, 폭넓은수요층이 형성되기가 어려웠다(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출판된 후, 책의 유포 과정이 매우 소극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점도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하지 못한 이유들 중 하나로 작용했는데, 이와 관련된 것은 잠시 후에 살펴보게 된다). 하지만 코페르니쿠스의 등장으로인해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과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은 기본 원칙에서부터 신뢰성을 상실해 가기 시작했다. 이젠 고전 천문학이 '전통 계승'이라는 명분만을 앞세워 학계를 끌고 가기엔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이것은 곧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의붕괴를 예고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