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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페르니쿠스 이론의 등장과 학계의 반응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가 출판되고 조금씩 배포되는 과정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새로운 행성 체계에 대한 학계의 회의적인 반응은 당연한것이었는데, 1543년에서 1600년까지의 기간에 코페르니쿠스 패러다임으로 개종한 천문학자는 극소수였다. 이런 결과는 세 가지 이유에서 비롯되었다. 첫째는 오지안더(Andreas Osiander, 1498-1552)가 작성한 『천구의회전에 관하여 서문(序文) 때문이었고, 둘째는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의 내용들이 어려운 기하학논증들로 이루어졌기 때문적이었고, 셋째는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가 출판된 후에 유포 작업이 효율적으로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코페르니쿠스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의 출판은 레티쿠스(Rheticus, 본명은 Georg Joachimvon Lauchen, 1514-1574)가 프롬보르크(Frombork)에 있던 코페르니쿠스로부터 원고를 넘겨받아 당시 출판 전문가였던 요하네스 페트라이우스(Johannes Petreius)가 운영하던 뉘른베르크의 한 인쇄소에 체류하면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막상 편집 작업이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레티쿠스는 라이프치히대학의 교수로 임용되는 바람에 출판 작업을 깨끗하게 마무리 짓지 못하고 수학과 천문학에 조예가 깊었던 루터파 신학자오지안더에게 원고 편집 작업을 위탁하고 라이프치히로 떠나야만 했다. 당시 오지안더는 루터교 목사로 뉘른베르크에 부임해 있었는데, 레티쿠스와 절친한 사이였던 그는 인쇄 전문가 페트라이우스와도 친분이 돈독했다. 이런 상황에서 오지안더는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의 서문을 대신 편집했는데, 그 주된 핵심은 '코페르니쿠스 이론은 단지 가설일 뿐이며, 이 책의 내용이 사실이라고 믿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것'이었다. 이 서문의 작성 의도가 어떤 것이었든지 간에 나름 효과를발휘한 듯 보이는데,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가 가톨릭교회 당국으로부터 위협적인 대상이라고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책이 유통되고도 한참 후의 일이었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 곁에서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의 출판 작업에큰 기여를 했던 레티쿠스는 책 서문에 자신의 공로에 대한 내용이 조금도 언급되지 않은 것에 분개한 나머지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가 출판된 후, 중요한 후속조치라고 할 수 있는 유포작업엔 손을 떼버렸다. 그 덕분에 출판 과정과 연계된 기획 단계에서 인쇄 작업을 장기간지속해야만 할 사업적 근거가 부족하고 말았다. 코페르니쿠스에게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빨리 출판하도록 독려해 왔던 쿨름(Kulm)의 주교 티데만 기세(Tiedeman Giese)가 레티쿠스에게 오지안더가 작성한 엉터리 서문에 관한 심각성을 지적하면서 그와 관련된 해결책을 부탁했지만, 레티쿠스가 정작 그 문제와 관련된 행동을 본격적으로 취한 것은책이 출판되고 수년이나 흐른 뒤였다.

케플러의 행성운동 1, 2, 3법칙이 발견될 때까지도(17세기 초까지도) 아리스토텔레스, 프톨레마이오스 추종자들은 자신들의 모순점을 보완하기 위한 목적으로만 코페르니쿠스 시스템의 일부 사항들에 관심을 두고 있을 뿐이었다. 당시 코페르니쿠스 시스템이 빠른 속도로 천문학계를 정복하지 못했던 이유는 지구중심설이 지닌 맹점에 대한 비판이 꾸준히 제기되긴 했지만, 지구중심설을 쉽게 폐기할 만큼 학계의 분위기가 새로운 행성 체계에 대한 열망이 절실하지 않았고, 항성에 관한 한프톨레마이오스 시스템은 오늘까지도 하나의 실용적인 근사값으로 사용될 만큼 나름대로 만족스러웠으며, 행성의 운동에 관한 예측 역시 코페르니쿠스 시스템만큼이나 정확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새롭게 등장한 태양중심설이 프톨레마이오스의 것보다 월등히 우수하다고 느낄 만큼 더 간결하거나 더 정확하다고 여겨지지도 않았다.

코페르니쿠스 이론이 학계에 쉽게 수용되지 못했던 또 다른 이유가있었다. 그 당시엔 정식 학문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다양한(특히 자연철학, 종교, 그리고 문화적 인식과 관련된 분야의 타이론들과 전체적인 통일성을가질 수 있는가?'라는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의 가설은 그렇지가 못했다.

16세기의 천문학자 그룹들은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과 직면하면서 선택적 기로에 서게 되었다. 첫째는 기존의 패러다임을 고수한 채몇 가지 모순점들을 제거하기 위한 코페르니쿠스 태양중심설의 부분적 응용, 둘째는 기존의 시스템들을 완전히 폐기하고 코페르니쿠스 태양중심설의 적극적 수용, 셋째는 철저히 기존 패러다임을 고수하는 것,이 세 가지 중에서 어떻게든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이런 과정은 과학혁명이 시작되면서 점차 심화 단계로 접어들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것인데, 실제 티코(Tycho Brahe, 1541-1601)가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을 일부 수용해서 아리스토텔레스, 프톨레마이오스, 코페르니쿠스의 것들과는 다른 독창적인 우주모델을 만들어 냈다는 점, 케플러와 갈릴레이는 처음부터 코페르니쿠스 패러다임이 진정참이라는 확신을 갖고 그 틀에 부합하는 관측과 계산을 통해 좀 더 정교한 태양중심설 모델을 만들어 냈다는 점, 17세기로 접어들 때까지도대부분의 고전 천문학자 그룹들이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 프톨레마이오스 패러다임을 신봉하며 심미적(美) 우주론 모델을 완성하기 위한연구를 지속했다는 점 등을 통해 세 가지 선택 사항들이 모두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이 확인된다.

특히 대학에 포진하고 있던 기독교 신학자들과 정통 아리스토텔레스 추종자들은 17세기 후반까지도 그들의 우주론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티코는 태양중심설을 부분적으로 응용하여 당시 수준으로서는 놀랄만큼의 정밀한 관측값을 토대로 독특한 구조를 지닌 새로운 지구중심 행성계를 설계했는데, 이것은 코페르니쿠스 이론이 절대적 가치로 인정받던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우주론의 축출 작업을 시작한 이래로 천문학계에서 인정할 만한 것들 중 가장 뚜렷한 '패러다임의 변종 과정'이라고 평가된다.

티코는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을 공부하면서 품었던 의문점들을 코페르니쿠스의 가설을 통해 부분적인 해답을 찾으려 했는데, 티코의 그런 시도는 프톨레마이오스 시스템만으로는 도저히 근본적인 해답을 찾을 수 없다는 확신 아래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티코는 자신의 종교적 신념 더불어 아리스토텔레스 원칙을 준수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결코 벗어나질 못했다. 그래서 정통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을 부정했을지라도 코페르니쿠스가 제안한 새로운 시스템으로 쉽게 빨려들질 않았다. 만약 티코의 관측값이 없었더라면, 케플러는 자신의 행성운동 제1, 2, 3법칙을 쉽게 유도해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고대 피타고라스의 수 개념과 고전 음악의 음률 법칙 역시 제3법칙인 '조화의 법칙'이 수립되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갈릴레이는 원궤도를 끝까지 견지함으로써 케플러의 법칙을 인정하 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직접 개량한 망원경을 이용해 금성의 위상 변화, 목성의 위성 발견, 그리고 태양의 흑점 등을 관측함으로써 신학에 기초한 고전 천문학의 구조적 모순을 확실히 반증해 보였다. 갈릴레이는 자신의 발견을 통해 코페르니쿠스 행성계가 옳다는 것을 만천하에 천명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천문학에서 망원경의 역할은 더 없이 중요한 것이 되었다. 이처럼 논리력의 증대와 관측 기기의 발달로 인해 코페르니쿠스 행성계의 위상과 영향력은 점차 확대되었다.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가 출판되자,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은 맥락적 역할을 수행하며 천문학 연구 결과들을 하나로 응축하는 구심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서 천문학 영역을 넘어 모든 학문의 가치 체계를 재구성하도록 압박하는 중핵 수행하게 되 역할을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1543)의 출판에서부터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1687)의 출판까지 대략 150년의 기간 동안 이루어졌던 연구 활동들은 행성들의 개별적 운동 방식을 정리하고 관측값의 전체적인 조화를 꾀했던 고전천문학의 연구 방식에서 과감히 탈피해, 지구중심설과 태양중심설이라는 두 개의 패러다임으로부터 추출해 낸 관측값들을 상호 비교·분석하는 과정을 통해 수리적 정교화를 꾀하는 방향으로 연구 초점이 이동했으며, 오래 전부터 천문학에 내재되었던 신학적(神學 요소들을 제거해가는 작업에도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르네상스 시대로 접어들면서 시작된 아리스토텔레스 우주론과 신(新)플라톤주의 우주론 간의 논쟁은 17세기까지도 여전히 이어졌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코페르니쿠스를 비롯한 16~17세기의 초기 근대 천문학자들은 지속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세력들과 맞서며 투쟁을 이어갔는데, 결국 케플러, 갈릴레이, 뉴턴을 비롯한 여러 천문학자들의 보다 정밀한 관측과 다양한 수학적 논증 등을 통해, 태양중심설이 완전한 이론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근대 천문학은 막을 열었다. 이러한 과정들은모두 코페르니쿠스가 등장함으로 인해 가능했던 것이기에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가 지닌 과학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마침내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1687)가 소개되자, 18세기로접어들면서 태양중심설의 진위에 대한 학계의 논쟁은 완전히 자취를감추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