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는 1473년 2월 19일 폴란드 토룬에서 독실한 가톨릭 집안의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상인으로서 나름 여유로운 가계(家)를 이끌어 갔는데, 코페르니쿠스가 열살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시기에 큰 누나는 수녀가 되어 있었고, 작은 누나는 이미 결혼하여 출가외인이 된 상태였으며, 형은 아직 나이가 어렸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코페르니쿠스는 당장 곤경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두 곳의 가톨릭 교구 운영위원회의 위원직을 맡고 있던 외삼촌 루카스 바첸로데(Lucas Watzenrode)의 도움을 받아 다행히 학업은 계속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바첸로데는 원래부터 부유한 상인 가문 출신이었으며, 일찍이 이탈리아 볼로냐 대학에서 교회법을 공부하고 돌아와 교회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훗날 대주교까지 이른 인물이다.
바첸로데는 자신이 지나온 길을 조카들이 그대로 따라와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코페르니쿠스와 그의 형을 당시 폴란드 최고의 명문인 크라쿠프대학(University of Kraków. 현재 이 대학은 Jagiellonian University로 교명이 바뀌었다)에 진학시켰다. 이 학교는 바첸로데 자신이 다녔던 학교이기도 하다. 그런데 외삼촌 바첸로데는 코페르니쿠스를 그의 형보다 더 신뢰하여 학업에 대한 지원마저도 차별했을 정도였다고 알려진다. 크라쿠프대학은 천문학 연구에 있어 명성이 높았던 학교였는데, 당시 학생수가 대략 1,500명 정도였고, 유럽의 다른 대학들과 마찬가지로 라틴어로 강의가 진행되었다. 그 곳의 교육과정은 일단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을 공부하는 것이 주를 이루면서 수학, 천문학, 유클리드 기하학, 법학, 신학 등이 병행되었다.
1482년, 코페르니쿠스는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과 라틴어로 번역된 아라비아의 천문학 교재를 통해 천문학 공부를 시작했다. 코페르니쿠스는 천문학 강의를 듣자마자 곧장 그 매력에 빠져 들었다. 그러다 코페르니쿠스는 4년간 공부했던 크라쿠프대학에서 학위를 받지도 않은 채, 외삼촌의 계획에 따라 프롬보르크(Frombork)로 떠나야만 했다. 프롬보르크에 도착한 코페르니쿠스는 우여곡절 끝에 그의 나의 스물두살이 되던 1495년에 바르미아(Warmia) 가톨릭 대교구 참사회 위원이 되었다. 그 이듬해 코페르니쿠스는 그의 외삼촌이 유학했던 볼로냐대학(Università di Bologna)으로 교회법을 공부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향한다. 그의 외삼촌은 코페르니쿠스를 교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만큼의 성직자로 크게 성공시킬 의도를 드러내며 자신이 밟아 왔던 길을 코페르니쿠스가 그대로 좇아오길 바라고 있었지만, 코페르니쿠스의 마음은 그와 달랐다. 1496년 9월, 이탈리아로 유학길에 오른 코페르니쿠스는 자신이 갖고 있던 천문학 관련 자료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챙겨서 길을 떠났다.
볼로냐대학의 강의는 당시 10월말에 시작되었는데, 여러 나라에서 유학 온 학생들이 많았기 때문에,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 학생인가에 따라 분반이 되었다. 볼로냐대학은 코페르니쿠스가 오기 거의 300여년 전부터 오랜 전통을 자랑하던 유럽 최고의 명문대학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대학처럼 각각의 단과대학마다 건물이 따로 마련되어 있던 것이 아니라, 같은 공용어를 사용하는 학생들이 그룹을 조직한 후, 자신들이 배울 전공 분야에 해당하는 교수를 선택해서 사사하는 구조로 운영되었다. 학생들이 전공할 분야가 결정되면 교수들은 각자 가르치게 될 학생들을 자신의 집에 하숙을 시키는 방식을 통해 수업을 진행했다.
1497년, 코페르니쿠스는 볼로냐대학의 천문학 교수였던 도메니초 마리아 다 노바라(Domenico Maria da Novara, 1454-1504)의 집에서 하숙을 하며 천체 관측을 보조하는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천문학 심화 과정을 익히게 된다. 노바라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프톨레마이오스 행성계를 심층 분석하여 보다 정교한 규칙을 만들려는 시도가 1450년대에 게오르그 폰 포이어바흐(Georg von Peuerbach, 14231461)라는 천문학자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그는 알마게스트』의 번역 작업을 완전히 마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하지만 그의 제자였던 레기오몬타누스(Regiomontanus, 본명은 Johannes Müller von Königsberg, 1436-1476)가 작업을 이어받아 결국 완성하게 된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가 볼로냐대학에서 하숙생으로 있으면서 사사한 도메니초 마리아 다 노바라는 레기오몬타누스의 제자였다. 레기오몬타누스는 1472년 핼리혜성을 관측한 후에 이것을 천체로 인정한 최초의 천문학자인데, 그는 신플라톤주의의 계승자였다. 이런 계보가 구성됨으로써코페르니쿠스는 신플라톤주의의 일원이 되었다. 코페르니쿠스는 볼로냐대학에서 천문학 공부에 심취해 있긴 했으나, 당시 프롬보르크의 참사회 위원이라는 신분이었기에 훗날 바르미아로 돌아가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교회법도 나름 열심히 공부해야만 했다.
1500년, 볼로냐대학에서 4년간의 과정을 마쳤으나, 학위를 받기 위한 시험을 치르지 않고 자신의 형 안드레아스와 함께 로마로 여행을 떠난 후, 이듬해 1501년 6월 무렵에 프롬보르크에서 개최된 바르미아 가톨릭 대교구 참사회를 찾아가 이탈리아로 가서 다시 공부할 수 있도록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참사회는 코페르니쿠스가 의학(醫學)을 공부하고 돌아와 참사회 위원들의 주치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학비를 후원해 주겠다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코페르니쿠스는 같은 해 10월, 이번에는 이탈리아의 파도바대학(Università di Padova)의 의학 과정에 등록했다. 파도바대학은 의학 분야에서 당대 최고의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그러나 당시 파도바대학 의학 과정의 수준은 2세기경 로마에서 활약했던 갈레노스(Claudios Galenos, 129-199)의 이론으로부터 크게 탈피하지 못한 상태였다.
어느덧 2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후원을 약속받은 기한이 다 지나게 되었는데, 의학박사 학위를 받기에는 많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그렇다고아무런 학위를 받지 못한 채 귀국할 수 없었던 코페르니쿠스는 경제적으로도 여유롭지가 못했던 터라, 볼로냐대학이나 파도바대학에서 학위를 받기 위해 소요되는 상당한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워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던 1391년에 설립된 페라라대학(University of Ferrara)에서 시험을 통과하는 방식을 거쳐 박사학위를 받기로 결심했다. 당시 이탈리아는 꼭 학업을 수행했던 대학이 아닐지라도, 일정 금액을 주고서 시험만 통과한다면 다른 대학에서라도 학위를 받을 수 있도록 해 주는 독특한 시스템이 운영되고 있었다. 1503 년 5월경에 코페르니쿠스는 이런 식으로 페라라대학에서 의학이 아닌 교회법 박사 학위를 받은 후, 그 해 가을에 바르미아로 돌아갔다. 코페르니쿠스는 귀국하자마자 교회의 재산을 관리하고 신학교의 수업 진행을 감독하는 등의 업무를 맡아보는 직책을 부여받았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대주교를 맡고 있던 외삼촌이 참사회 위원들의 동의를 얻어 조카인 코페르니쿠스로 하여금 자신을 보좌하는 업무를 맡으면서 봉급을 받을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다. 그 시절 코페르니쿠스는 외삼촌을 보좌하면서 주변인들의 주치의治醫) 역할도 했는데, 틈틈이 시간을 내어 그리스어 공부를 시작했다. 그가 그리스어를 공부해야만 했던 이유는 프톨레마이오스의 관측 결과들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고대 그리스 달력을 이해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우선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를 요약하고 꼼꼼하게 주해(註解)를 단 레기오몬타누스의 알마게스트 발췌본(Epitome of the Almagest)』을 집중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프톨레마이오스의 이심원과 주전원의 기능을 서로 바꾸어서 분석한 레기오몬타누스의 이론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곧장 코페르니쿠스에게 새로운 영감을 제공했다. 왜냐하면 당시 레기오몬타누스의 이론은 태양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행성계를 착안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510 년, 코페르니쿠스는 외삼촌의 보좌관직을 그만두고 프롬보르크로 가서 가톨릭교회 참사회 위원으로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그는프롬보르크 교회에 부임하자마자 곧장 방어용 성벽의 한 탑에 기거하면서 천체 관측과 그에 따른 자료 분석을 통해 본격적인 천문학 연구를 재개했다. 물론 참사회 업무 역시 충실하게 병행하면서였다. 그러던 중 1512년 3월경에 바르미아 대주교를 맡고 있던 외삼촌 바첸로데가 세상을 떠났다. 외삼촌의 뒤를 이어 대주교 직을 맡게 된 후임자는코페르니쿠스와 함께 볼로냐대학에서 수학했던 파비안 루찬스키 (FabianLuzjanski)였다. 11년 후, 루찬스키는 1523년 1월경에 세상을 떠나는데,그 후 모리스 퍼버(Maurice Ferber)가 후임으로 선출되어 대주교 직을 맡기까지 몇 개월간 코페르니쿠스가 루찬스키의 업무를 대행했다. 1529년부터 코페르니쿠스는 틈틈이 시간을 내어 그 동안 관측하고 연구해 왔던 자신의 자료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코페르니쿠스가 소속된 참사회 내에서도 새로운 행성계 이론인 태양중심설은 점차 관심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는데, 참사회 위원들 중 한명이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과 관련된 여러 사항들을 교황 클레멘트 7세(Pope Clement VII)의 비서에게 알려 주었다. 그러자 얼마 되지 않아,교황과 여러 추기경들 사이에서 코페르니쿠스의 행성이론이 조금씩 회자되기 시작했다.
1534년, 교황이 서거하자 교황의 비서직을 수행했던 사람이 이번에는 자리를 옮겨 쇤베르크(Nicholas Schönberg) 추기경의 비서직을 맡게 되었다. 1536년, 쇤베르크는 새로운 행성이론과 관련된 연구의 진행 과정을 자신에게 자세하게 알려 주기를 부탁하는 내용을 담은 편지를 코페르니쿠스에게 보냈다. 그 시기 첼름노(Chelmno)의 대주교였던 기세(Tiedemann Giese) 역시 코페르니쿠스와 아주 돈독한 사이였는데, 그는 새로운 행성이론이 조속히 책으로 출판되어야만 한다고 코페르니쿠스를계속 설득하고 있었다.
1539 년, 루터파 (Lutheran) 학문의 중심축이었던 비텐베르크대학에서학생들을 가르치던 레티쿠스가 불현듯 코페르니쿠스를 찾아와 새로운행성이론을 배우기 시작했다. 레티쿠스는 코페르니쿠스의 제자로 3년간 머물면서 태양중심설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우주론을 수립하는 작업에 큰 기여를 했다. 특히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가 출판되기 3년 전인 1540년에 레티쿠스는 최초의 보고서(Narratio Prima)」를 통해 코페르니쿠스를 프톨레마이오스와 동등하다고 평가했는데, 이런 도발에 대해 당시 천문학계는 그다지 거친 대응을 하지 않았다. 이런 반응에 고무되어 코페르니쿠스는 자신의 원고 작업에 더욱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최초의 보고서』는 지구의 운동에 바탕을 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간략하게나마 미리 소개하는 양식을 취했다. 이것은 1512년에 발표된 짧은 주석(Commentariolus)』 이후,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을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한 최초의 출판물이라고 할 수 있다. 레티쿠스는 이책을 인쇄소에서 출판할 당시 겸손한 태도를 보일 의향으로 일부러 자신의 이름을 저자명으로 넣지 않았다.
코페르니쿠스가 저술한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의 원래 제목은 『회전(Revolution)』이었다. 그런데 원고(原稿)에 기록된 표현 기법들이 다소 복잡했기 때문에, 정교한 인쇄 장비가 구비된 곳이 아니라면 출판하기가어려웠다. 그래서 여러 차례 논의 끝에 레티쿠스가 원고를 필사해서 당시 첨단 장비가 잘 구비된 뉘렘베르크지역에 있는 인쇄소에서 출판 작업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1541년, 레티쿠스는 회전의 원고를 들고 일단 비텐베르크대학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곳에서 이듬해까지 학생들을 가르쳤다. 1542년 5월이 되자 레티쿠스는 원고 뭉치를 들고 당시 인쇄 기술이 뛰어나다고 명성이 자자했던 페트라이우스의 인쇄소를찾아가 작업을 의뢰했다. 하지만 레티쿠스는 출판 과정 전체를 마무리짓지 못했다. 왜냐하면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수학 교수직을 맡아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레티쿠스는 그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가없었다. 1542년 가을, 레티쿠스는 길을 떠나면서 오지안더에게 출판작업의 마무리를 간곡하게 부탁했고, 오지안더는 적극적으로 돕겠다는의사를 표명했다.
1542년 6월에 시작하여 10개월간의 작업 기간을 거치면서 4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양이 인쇄되었는데, 이 때 책의 제목이 회전에서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로 바뀌게 된다. 조금씩 인쇄물이 나올 때마다 코페르니쿠스에게로 보내졌고, 그것은 교정이 되어 다시 인쇄소로 되돌아왔다.
1542년 12월, 코페르니쿠스가 뇌졸중으로 쓰러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결과 코페르니쿠스는 신체의 오른쪽 모두를 사용할 수 없게 되어원고 집필이 더 이상 불가능하게 돼 버렸다. 우여곡절 끝에 1543년 3월말에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는 완성된 책으로 나왔는데, 훗날 전하는바에 따르면 코페르니쿠스가 책으로 완성된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마지막 순간까지 보지 못했다는 설과 그가 세상을 떠난 1543년 5월 24일에 책을 전해 받긴 했으나, 정신이 아주 혼미한 상태였던지라 책 자체를 제대로 넘겨보지도 못했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해진다. 종교적 신념과천문학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며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했던 코페르니쿠스는 생전 큰 영광을 누리지도 못한 채 조용히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우리나라에서 통용되는 나이로 향년 71세였다.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은 2천 년 이상 지속되었던 지구중심설을 폐기시키는 단초였을 뿐만 아니라, 근대 과학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지금도 그의 사상은 여러 분야에서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이라는 이름으로 회자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