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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코(Tycho Brahe)

티코(Tycho Brahe)는 1546년 12월 14일 현재는 스웨덴의 영토이지만당시엔 덴마크 영토였던 헬싱보르크(Helsingborg)에 있는 크누트스트루프성(Knutstrup 城)에서 태어났다. 그는 당시 덴마크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던 가문들 중 하나인 브라헤(Brahe) 가문의 오테(Otte)와 빌레(Bille)가문의 베아테(Beate) 사이에서 쌍둥이 중 하나로 태어났는데, 할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게 된 자신만이 살아남았다. 티코는 오테와 베아테의두 번째 자녀이자 장남이었다. 오테는 자신의 동생 요르겐(Jorgen)과 제수(弟)였던 잉게르(Inger) 사이에 아이가 없었기에 둘째아들이 태어나게 되면, 티코를 동생네 부부에게 입양시켜 대신 키울 수 있도록 해 주겠다고 약속한 적이 있었다. 그러던 중 티코의 첫 번째 생일이 지나고일주일 후, 베아테는 슈텐(Steen)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는 둘째아들을 낳게 된다. 그러자 곧 요르겐은 오테에게 약속을 지키라고 재촉했으나, 오테는 장남으로 태어난 티코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약속 이행을 계속 미루게 되는데, 그런 줄다리기 싸움이 일 년 이상 지속되자 요르겐과 잉게르는 두 살이 된 티코를 납치하여 덴마크 동부의 토스트루프(Tostrup) 지역에 위치한 자신들의 성(城)으로 데리고 가 버렸다. 처음에는 오테와 베아테가 상당히 격분했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런 변화를 조금씩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티코가 양부모 슬하에서 자라긴 했으나, 자신의 친부모를 만나기 위해 크누트스트루프 성을 자주 방문했다.

티코(Tycho Brahe)


티코는 열두 살이 될 때까지 집 근처에 있던 대성당(大) 부속학교에 입학해 라틴어, 수학, 음악, 연극 등을 배웠는데, 당시 그 학교는 마르틴 루터에 의해 수립된 신개념의 프로테스탄트 교리를 다룬 과목들도 반드시 이수하도록 교육과정이 짜여 있었다. 티코의 프로테스탄트 성향도 이 때부터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1559년 4월, 열세 살이 된 티코는 귀족 계급의 자녀들을 위해 수사학, 철학, 법학 등으로 학습 집중화가 이루어진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있던 코펜하겐대학에 입학하게 되는데, 그는 천문학을 이곳에서 처음 접하게 되었다. 티코가 천문학 공부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자신이 궁금해 하는 것들에 대해 교수들 대부분이 정확하게 답을 해 주지 못하고 있음을 깨닫고 크게 실망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로 인해 천문학에 더욱 흥미를 갖게 된 티코는 천문학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 천문학 관련 서적과 천구(天球)를 비롯한 각종 물품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티코는 코펜하겐대학에서 3년 동안 공부했는데, 그 기간 동안 아리스토텔레스, 프톨레마이오스, 코페르니쿠스 등 여러 천문학자들이 주장하는 이론들을 서로 비교하며 천문학자로서의 꿈을 키워 나갔다. 그러나 티코의 양부(父) 요르겐은 티코가 귀족 계급에 걸맞은 공부를 해주길 내심 바라고 있었다.

1562년, 요르겐은 티코를 독일 동부에 위치한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보내 법학 공부를 좀 시키고자 했는데, 그 동행으로 티코보다 4살 연상인 안데르스 쇠렌센 베델(Anders Sorensen Vedel)을 동료 겸 조언자로 함께 보냈다. 훗날 베델은 '덴마크의 위대한 역사가라는 칭호를 받게 되는 인물이었다. 그 해 3월 24일, 그 둘은 라이프치히에 도착하자마자 어느 교수의 집으로 하숙을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것이 라이프치히대학 생활의 시작이었다. 사실 베델은 티코가 천문학을 가까이 하지 못하도록 단속하는 임무를 띠고 동행한 것이었으나, 채 얼마 되지도 않아 그는 티코의 재능과 열정에 감복하여 자신의 역할을 포기하고 말았다.

1565년 5월 중순, 티코와 베델은 라이프치히대학에서 3년이라는 시간을 보내고 덴마크로 돌아왔다. 같은 해 6월, 티코의 양부 요르겐이 당시 덴마크 국왕이었던 프레데릭 2세와 함께 만취한 상태에서 다리를 건너려다 물에 빠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긴박한 상황에서 요르겐은 물에 빠진 왕을 구하게 되지만, 자신은 그 사건의 후유증으로 인해 폐렴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566년 초, 티코는 다시 한 번 베델과 함께 독일의 비텐베르크대학으로 유학을 떠날 결심을 하게 되는데, 당시 비텐베르크대학은 종교개혁의 발상지이자 중부 유럽의 학문을 대표하는 중심지였다. 다시 독일로 유학을 떠나겠다고 집안사람들에게 말했을 때, 티코의 의견을 존중해준 것은 오직 외삼촌 슈텐 빌레(Steen Bille)뿐이었다. 여전히 다른 가족들과 친척들은 티코가 천문학에 빠져 있는 것을 영 탐탁지 않게 여겼다.

1566년 4월 15일, 티코는 베델과 함께 비텐베르크에 도착해 학업에 열중했으나, 다섯 달이 지났을 무렵 전염병이 창궐하는 바람에 독일 북동부에 있는 로스토크(Rostock)대학으로 이동해야만 했다. 로스토크대학의 천문학 수준은 사실 별로였다. 하지만 티코가 그 곳에 머무는 동안 그 해 10월 28일에 월식을 관측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티코는 연말까지 로스토크에 머물기로 하고, 그 곳에서 신학 교수였던 루카스 바흐마이스터(Lucas Bachmeister)와 과학과 수학에 대해 토론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크리스마스 연휴 기간에 바흐마이스터의 집에서 파티가 열렸는데, 티코는 여러 동료들과 함께 천문학과 관련된 문제들을 토론하던 중 자신의 팔촌(寸) 친척인 만더루프 파르스베르크(Manderup Parsberg)와 시비가 붙고 말았다. 그 날 밤에는 다행히 큰 싸움으로 번지진 않았으나, 며칠 후인 12월 29일에 다른 모음에서 그 두 사람이 다시 만났을땐 칼부림이 나고 말았다. 당시 그 둘은 파티 장소에서 빠져 나와 교회마당에서 결투를 벌이게 되었는데, 결국 티코는 자신의 코가 베여 나가는 중상을 입고 말았다. 그 사건은 티코가 평생 합금(金)으로 만든 인공 코를 달고 다니게 만들었으며, 콧등 위에 연고를 바르거나 접착을 위해 아교를 바르고 문지르는 일은 그에게 흔한 일상이 되고 말았다.

티코가 외견상으로는 강한 의지의 소유자인 양 행세했으나, 내심 향수병에 몹시 시달렸다. 그는 1567년 말에 덴마크로 돌아왔다. 그러나 덴마크에 계속 머물 수가 없었다. 티코는 천문학자가 되겠다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스위스 바젤대학을 경유해 이듬해 독일의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대학으로 들어갔다.

그 당시 귀족 계급의 학생들은 생업을 위해 공부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굳이 대학 졸업장이 필요치 않았는데, 티코가 자신의 관심 분야를 찾아 여러 대학을 자꾸 옮겨 다니며 공부하는 것이 평범하고 당연한 것은 아닐지라도, 그리 이상하게 여길 만한 일도 아니었다. 티코가 아우크스부르크에 머무는 동안 천문학자 파울 하인첼(Paul Hainzel)과 교분을 쌓게 되는데, 그 둘은 서로 의기투합하여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 규모의 천체 관측용 사분의를 제작하기도 했다.

1570년, 티코는 생부(生)인 오테가 병중에 있다는 전갈을 받고 덴마크로 돌아온다. 이듬해 봄, 오테는 헬싱보르크 성에서 쉰셋이라는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오테는 자신의 아내와 자녀들에게 상당히 많은 유산을 남기고 떠났다. 당시 법률적으로 딸은 상속권이 없었기에, 티코에게 돌아오는 지분은 더욱 많아졌다. 그러나 불어난 재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티코는 '위대한 천문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다시 덴마크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런데 당시 덴마크를 통치하고 있던 프레데릭 (Frederick) 2세는 자신의 왕국을 유럽의 학문 중심지로 만들기 위해 여러 장학제도를 시행하며 학자들을 덴마크로 유인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는 티코의 양부에 의해 자신의 목숨을 건진 바가 있었기에, 티코에게 남다른 호의를 베풀고자 했으며 티코의 재능 또한 높이 평가했다.

티코는 오테의 장례 절차를 담당하고 있던 루터파 목사인 요르겐 한센(Jorgen Hansen)의 딸 키르스텐 요르겐슈다터(Kirsten Jorgensdatter)를 우연히 만나게 되는데, 그들은 곧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귀족과 평민 출신간의 혼인이 그리 흔하지 않던 시대였던지라 주변 사람들의 반대가 무척 심했다. 그러나 당시 혼인법(法)에는 '어떤 남녀든 간에 같은 집에서 3년간 공개적인 동거를 하게 되면 법적인 부부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조항이 명시되어 있었기에, 티코는 그 방식을 통해 키르스텐과 부부가 되었다. 그런데 국왕 프레데릭 2세 역시 왕족 신분으로 하층 계급 출신의 여인과 사랑에 빠진 적이 있었는데, 결국 신분 격차를 극복하지 못해 부부가 될 수 없었던 뼈아픈 과거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티코와 프레데릭 2세는 서로를 이해하며 동병상련의 정을 나눌 수 있었는데, 이런 정신적 연대는 프레데릭 2세로 하여금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티코가 절대 덴마크를 떠나지 못하도록 해야겠다는 집착을 낳게 만들었다.

한편 티코는 키르스텐과 혼인한 후, 외삼촌 슈텐 빌레가 있는 헤레바드(Herrevad) 수도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슈텐의 저택은 웅장했으며 연금술 작업실까지 갖추고 있었다. 티코는 그 곳에서 본격적인 천체 관측을 시작했다.

1572년 11월 11일 밤, 티코는 자신의 실험실에서 일과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카시오페이아 별자리 근처에서 지금까지는 볼 수 없었던 낯선 빛 하나가 반짝이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여덟 달 동안이나 그 빛을 관측한 후, 그것은 달보다 훨씬 더 먼 곳으로부터 오는 빛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티코는 그 빛을 새로운 별의 탄생이라고 확신했는데, 이것이 곧 신성(星)이었다.

티코가 처음에는 신성에 관한 관측 자료들을 정리해 굳이 출판까지 해야겠다는 의도를 갖고 있지는 않았었는데, 자신을 키워 준 양모(母)잉게르 옥세 (Inger Oxe)의 오빠이자 아마추어 천문학자였던 페데르 옥세(Peder Oxe)의 권유로 1573년에 그 동안의 연구 결과들을 개략적으로 정리하여 『신성(新星)에 관하여(De Stella Nova)라는 제목의 책을 증정본 형태로 출판하였다. 이 책의 출판을 통해 티코는 천문학자로서의 명성을 떨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프레데릭 2세는 티코를 더욱 놓아줄 수가 없게 되었다. 프레데릭 2세는 티코에게 코펜하겐대학에서 강의를 좀 해 주길 부탁했고, 티코는 자신의 연구 성과들을 알리고 싶은 욕심에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강의를 맡기 시작하면서부터 티코는 계속 시간에 쫓기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급기야 천문학 연구를 제대로 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자, 티코는 강의를 접고 말았다.

프레데릭 2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티코는 덴마크에서의 삶이 점점 못마땅해졌으며 천문대를 운영하며 천상계를 완벽하게 해석할 수 있는 천문학자가 되겠다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비텐베르크나 바젤로 이주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어디로 이주해야 할지를 결정하기 위해 여러 곳을 여행하며 탐색한 결과, 티코는 바젤이 가장 적당한 곳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티코는 바젤로 이주할 결심을 굳히고 덴마크로 돌아왔는데, 프레데릭 2세는 티코를 붙잡아두기 위한 목적으로 파격적인 제안을 하게 된다. 프레데릭 2세는 티코가 천체관측소를 세우고 아무런 간섭도 없이 자유롭게 연구 활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해 주기 위해 성(城)을 하나 고를 수 있는 선택권을 부여했다. 하지만 티코는 바젤로 가겠다는 결심이 확고했던지라, 그 제안을 거절했다. 이런 줄다리기가 이어지다 1575년에 이르러 프레데릭 2세는 더욱 엄청난 제안을 하게 되는데, 아예 벤(Hven)이라는 섬을 하나 할양해서 그 곳의 영주가 되어 독자적인 연구 활동을 마음 놓고 할 수 있도록 모든 지원을 제공하겠다는 것이었다. 벤은 현재 덴마크와 스웨덴 사이의 있는 외레순(Øresund) 해협 안에 위치한 섬이다.

티코는 여러 친구들 그리고 친척들과도 상의한 후, 결국 벤셈으로 이주하기로 결심했다. 1576년 2월 18일, 드디어 티코를 비롯한 그의 식솔들이 벤섬에 도착했다. 당시 그 곳에 거주하던 토착민들의 수는 대략 200여 명 정도였다. 그런데 티코가 이주하고 얼마 되지 않아, 티코와 주민들 사이에는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당시 주민들은 소작의 형태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는데, 예전까지는 그들 자신들과 관련된 일들에 대해서만 신경 쓰며 살았다. 그리고 오직 왕에게만 복종할 뿐이지, 섬의 경작지에 대한 소유권도 내심 자신들이 가졌다고 생각하며 살아오던 주민들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귀족의 사적인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천문대와 저택을 건설하는 노역동원에 얽매이게 됨으로써,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없을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고 말았다. 이런 예상치 못한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몇몇 주민들은 평생의 모금자리였던 벤섬을 아예 떠나 버렸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벤섬의 중앙에 우라니보르크(Uraniborg: ‘우라니아의 성(城)'이라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우리니아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천문을 주관하는 여신이다 티코는 이제 프레데릭 2세의 경제적 지원 그리고 상속으로 물려받은 유산으로부터 고정적으로 들어오게 되는 상당액의 수입을 마음껏 운용할 수 있게 되었다. 벤섬의 우라니보르크에는 식솔)이 상당히 많았는데, 그 당시 티코 부부와 그들 사이의 자녀들, 사제, 가정교사들, 유모들, 요리사들, 정원사들, 제단사들, 경비원들, 마부들, 가사를 전담하는 가정부들, 하녀들, 관리 업무를 총괄하는 비서 등을 포함해 천체관측 작업을 보조하고 배우기 위해 여러 지역에서 찾아온 학생들을 다합하게 되면 자그마치 수십 명에 이를 정도였다. 티코에게 천문학을 배우러 여러 곳에서 학생들이 모여들었는데, 그들의 출신 국가는 덴마크,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네덜란드, 독일, 영국 등 다양했다. 이들은 연평균 150~185회 정도의 야간관측을 실시했는데, 관측은 팀별로 이루어졌으며 한 팀은 세 명으로 구성되었다. 가장 경험이 많은 사람이 팀장을 맡았으며, 한 명은 등(燈)을 들고서 관측된 값을 불러주고, 다른 한명은 관측 시간을 불러 주고, 세 번째 사람은 관측값과 시각을 관측일지에 기록하는 형태로 작업이 진행되었다.

페테르 야콥센 플렘로제(Peter Jakobsen Flemlose), 엘리아스 올젠 모르징(Elias Olsen Morsing), 크리스티앙 롱고몬타누스(Christian Longomontanus)는 재능이 뛰어나 티코가 무척 신뢰하고 아꼈던 제자들이었는데, 특히 티코와 8년 동안 함께 고생하며 언제나 헌신적이었던 롱고몬타누스는 그들 중 가장 출중했다. 망원경이 아직 발명되지 않았던 시기에 역대 가장 정교한 관측값들을 보유하고 있던 티코는 훗날 케플러가 행성 운동의 법칙들을 이끌어 낼 수 있도록 중요한 기초 자료를 제공했다.

티코가 그런 자료들을 풍부하게 보유할 수 있었던 것은 관측 장비들 을 개량하는 작업을 평생 동안 지속했기 때문이었다. 티코가 대형 육분의와 사분의를 비롯한 여러 관측 장비들을 개량할 때면, 언제나 우라니보르크에 소속된 기능공, 조각가, 건축가 등과 함께 충분하리만큼 논의를 거듭함으로써 관측 장비의 정밀도를 높이는 데 만전을 기했다.

당시 티코가 최첨단 관측 장비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할지라도, 여전히 연주 시차를 발견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항성들이 너무나 멀리 있었기 때문인데, 연주 시차의 발견은 19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가능했다. 독일의 베셀(Friedrich Wilhelm Bessel, 1784-1846)이 1838년에 백조자리 61번 별의 연주시차 0.31"를 발견한 것이 최초였다. 0.31"라는 것은 원각)을 기준으로 1의 3000의 1인 1"보다도 더 작은 각도를 말한다. 1

연주 시차가 이처럼 같은 각도이기에 16세기의 관측 도구로서는 당연히 발견하기가 불가능했다. 현재 관측된 별들 중에서 가장 큰 연주시차를 보여 주고 있는 별인 프록시마 센타우리(Proxima Centauri)도 그 각이 0.76"밖에 되지 않는다.

결국 티코는 코페르니쿠스 행성계를 선택하지 않고, 지구중심설을 기본 틀로 설정한 후, 자신이 구상해 왔던 여러 요소들을 조금씩 가미하는 방식을 통해 새로운 천상계를 그려 나갔다.

티코는 벤섬에서 천체 관측에만 몰두한 것은 아니었다. 예전에 그 곳에서 유행했던 페스트와 발진티푸스와 같은 질병 등을 치료할 목적으로 의약품 개발을 위한 연구도 병행했는데, 벤섬 주민의 대부분은 티코의 이런 의도만큼은 고맙게 여겼다. 그러나 주민들 중 몇몇은 티코를 신뢰하지 못하고, 자신들이 실험 대상이 되고 있음을 의심하기도 했다.

1572년에 티코가 발견했던 신성과 관련된 연구 성과는 프레데릭 2세가 벤섬을 하사하고 우라니보르크 성을 건립하는 데 소요되는 비용을 적극적으로 후원하도록 유도했는데, 이후 또 다른 획기적인 연구 성과는 1577년 11월 13일에 발견된 혜성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1578년에서 1587년까지 무려 10년 동안이나 그 혜성에 관한 연구에 몰두하게 되는데, 여러 단계로 구성된 내용과 그림으로 짜여진 원고를 작성하여 천상계의 최근 현상들(Recent Phenomena in the Celestial World)』이라는 책을 1588년에 펴내게 된다. 이 책은 꼬리를 가진 별(Stella Caudata)』이라는 별칭으로도 유명한데, 혜성의 이동 경로와 관측 결과들을 아주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티코는 이 책에서 혜성의 꼬리가 항상 태양의 반대편으로 뻗어나가고 있음을 입증했다. 티코는 혜성의 위치가 달의 공전 궤도를 넘어서는 바깥쪽 영역에 있음을 증명했는데, 이것은 모든 천상계의 변화는 달의 회전구 안쪽에서만 일어난다는 전통적인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당시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은 모든 대학과 연구 기관에서 자연과학의 근본으로 숭상되어지고 있었기에 티코의 이런 발표는 기존 천문학의 원칙을 완전히 깨뜨리는 것이었다.

티코는 혜성의 이동 경로가 원궤도를 이루고 있지 않을 뿐더러, 행성들의 운동 궤도를 교차하고 있다는 것까지 증명함으로써 코페르니쿠스의 이론 중 일부는 옳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티코는 아리스토텔레스, 프톨레마이오스, 코페르니쿠스의 이론들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자신만의 독창적인 행성계 시스템을 고안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한편 1588년에는 덴마크 내부에 여러 변화가 있었는데, 열 살에 불과한 왕세자 크리스티앙(Christian)이 프레데릭 2세의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하지만 소피아 왕비의 독단적인 정치 간섭을 견제하기 위해 귀족세력들은 대의원을 선출하여 섭정위원회를 만들어 통치 권력을 분산시키는데 성공했다. 티코는 법률상으로 귀족과 평민 사이에 태어난 자녀들은 유산을 상속받을 수 없다는 걸림돌을 제거하기 위해 줄곧 노력해왔음에도, 프레데릭 2세의 치세 기간 동안에 명확한 해결을 보지 못했다(프레데릭 2세가 구두로 약속을 해 준 적은 있으나, 문서상으로는 승인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섭정위원회가 들어서자 티코는 실세들을 중심으로 좀 더 적극적인 회유 활동을 펼치게 되는데, 결국 티코의 아들 중 하나가 우라니보르크를 상속할 수 있도록 승인받는 데 성공하게 된다.

그러나 벤섬 주민들의 원성은 시간이 갈수록 커져 갔으며, 그에 관한 소식들이 왕실 내부로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또 한편으로 프레데릭 2세가 안치되어 있는 로스킬레 대성당 소속의 '성(聖) 동방의 세 박사(The Holy Three Kings)' 예배당의 관리를 담당하는 명목으로 녹봉을 받아 오고 있던 티코가 예배당 관리를 형편없이 하고 있음이 드러나자 왕실은 그에게 여러 번 경고를 주었다. 그러나 선왕의 무덤 관리가 전혀 개선되지 않자, 티코에 대한 크리스티앙의 신망은 급격히 무너지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티코가 젊었던 시절엔 국내외 주요한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하고, 그 입안 국왕으로 하여금 실행하도록 설득하던 자문기관들을 인 추밀원의 구성원들이 그의 절친한 귀족 친구들과 브라헤 가문의 사람들로 구성이 되었으나, 프레데릭 2세가 세상을 떠난 후엔 브라헤 가문의 적대 세력들이 섭정위원회의 구성원으로 조금씩 들어가게 되자, 상황은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섭정위원회의 활동이 마무리 단계에 이르고, 이윽고 크리스티앙이 정식으로 국왕에 즉위하게 되자 티코의 후원 세력들은 거의 소멸해 버렸다.

1596년 8월 29일, 당시 열아홉 살이던 왕세자 크리스티앙 4세가 덴마크 국왕으로 즉위했다. 그는 대관식을 치르고 얼마 되지 않아 곧장 티코가 누리고 있던 권한과 혜택들을 박탈하기 시작했다. 특히 크리스티앙 4세는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왕권신수설 통치 이념을으로 삼으며 왕권 행사에 강한 의지를 보였다. 티코의 일부 부적절했던 행동들이 벤섬 주민들의 탄원서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자, 왕실에 포진하고 있던 티코의 적대 세력들은 이 사태를 티코를 비롯한 브라헤 가문 세력들을 축출하기 위한 절호의 기회로 삼았다. 결국 벤섬의 모든 재산과 권리들을 자녀들에게 세습할 없도록 하는 조치가 내려지자, 이제 티코에게 남은 것은 식솔들을 정리하고 벤섬을 떠나는 것뿐이었다.

티코가 벤섬을 떠난 후, 코펜하겐에 마련한 자신의 집 근처에 있는 도시 성벽 위에서 천체 관측을 시도하려 했을 때, 시() 당국은 허가를 내주지 않았는데 그러한 행정 조치는 크리스티앙 4세를 위시해 티코의 정적들이 배후에서 압력을 행사한 결과였다. 코펜하겐에 머문 지 3개월이 지난 후, 그는 덴마크를 떠나야겠다는 결심을 확실히 굳히게 된다.

티코는 멕클렌부르크(Mecklenburg)의 울리히(Ulrich) 공작에게 독일의 로스토크(Rostock)에 자신의 식솔들이 기거할 수 있는 거처를 마련해 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는 덴마크에서 무시당하며 불명예스럽게 사느니 차라리 다른 나라로 망명해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 줄 심상이었다. 얼마 후, 울리히 공작으로부터 티코를 돕겠다는 답신이 왔다. 그리하여 50세에 접어든 티코는 아내 키르스텐과 자녀들, 하인들, 그리고 자신을 변함없이 따랐던 벤섬의 목사 레베렌트 벤조질(Reverend Wensosil) 등을 포함해 20여 명을 이끌고 로스토크로 향했다.

1597년 9월, 티코의 식솔들은 또 다시 로스토크를 떠나 하인리히 란차우(Heinrich Rantzau)의 배려로 함부르크 인근의 반트스부르크(Wandsburg)성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한동안 제대로 된 연구를 하지 못했던 티코는 반트스부르크 성에 도착하자마자 본격적으로 천체 관측을 재개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티코가 거처를 옮길 때마다 크리스티앙 4세에게 서신을 보내어 타협을 도모했는데, 그런 시도는 오히려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기는 결과만을 초래했다(크리스티앙 4세는 티코의 편지 내용이 불손하기 그지없다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티코는 하는 수 없이 지속적인 후원을 해 줄 수 있는 국가 지도자를 좀 더 폭넓게 찾아야만 했다.

1598년에 이르자, 티코는 자신이 개량한 천체 관측 장비들의 특징과 사용법 등을 자세히 소개한 책 『최신 천체 운동론(Astronomiae instauratae mechanica)』을 저술하게 된다. 티코는 황실을 프라하(Prague)로 옮겨와 있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루돌프 2세(Rudolph II)에게 자신이 저술한 책과 함께 자신의 연구를 지원해 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루돌프 2세는 정치와 관련된 분야보다 과학과 기술 분야에 관심이 더 많았던 황제였는데, 그는 400년을 넘게 신성로마제국을 통치해 온 합스부르크(Hapsburg) 왕가의 자손이었다. 당시 신성로마제국은 현재 독일과 오스트리아 지역의 대부분을 아우르는 유럽 중앙에 위치한 여러 작은 국가들의 연합체였는데,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력이 발휘되거나 칙령에 의한 구속력이 엄격하게 집행될 만큼 견고한 제국의 위용을 보이지는 못했다.

원래 1599년 1월경에 티코와 루돌프 2세가 만나기로 예정이 되어 있었는데, 여러 사정으로 인해 7월 초에야 만남이 성사되었다. 티코는 자신의 아들과 함께 황제가 머무르고 있던 흐라드차니(Hradcany) 성으로 가서 황제를 알현했다. 티코는 루돌프 2세에게 자신의 연구 업적들을 설명하기 위해 항성목록, 관측 장비에 대한 자료, 행성계 연구에 관한 내용들을 정리한 책자 등을 가지고 궁으로 들어갔는데, 그 자료들이 보여 주는 참신함과 티코의 열정에 감복한 루돌프 2세는 세습이 가능한 봉토를 하사하겠다는 것과 1522년경에 건축된 베나트키(Benátky) 성을 모금자리로 하여 천체 연구를 계속할 수 있도록 후원해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 약속은 곧장 실행으로 옮겨졌는데, 티코는 베나트키 성을 제2의 우라니보르크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수립하고 필요한 절차들을 신속하게 행동으로 옮겼다.

1600년 2월, 예전에 서신 교환을 통해 뛰어난 재능을 짐작할 수 있게 해 주었던 케플러가 베나트키 성으로 들어와 티코와 함께 연구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은 구상하고 있던 행성계의 기본 틀이 각자 달랐으며, 성격을 비롯해 사고방식까지도 닮은 점이 별로 없었다. 당연히 다툼과 화해는 반복되었다. 하지만 서로 상대가 지닌 재능만큼은 언제나 높게 평가했다.

당시 티코는 53세였고, 케플러는 29세였는데, 티코가 관측 자료들을 제대로 열람할 수 없도록 통제하기에 이르자 케플러는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다. 티코가 케플러에게 제한된 정보만을 제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태양을 중심으로 행성들이 공전하고, 이 태양계가 다시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한다'는 티코의 수정(II) 지구중심설에 대해 케플러가 전혀 동의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티코는 케플러가 관측 자료만을 요구할 뿐, 정작 자신이 견지하고 있던 수정) 지구중심설과 관련해서는 함께 연구할 의지가 전혀 없음을 재빨리 간파했다. 그들이 다툴때는 서로에게 온갖 욕설을 퍼붓었으며, 화를 참지 못한 케플러는 베나트키 성을 뛰쳐나가곤 했다. 그러다 시간이 좀 흘러 케플러가 분을 다삭일 시점에 이르게 되면 다시 베나트키 성으로 돌아왔는데, 그럴 때마다 티코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케플러를 맞이했다. 케플러가 베나트키 성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당장 티코로부터 제공받는 봉급이 없이는 그의 가족들을 부양할 수 있는 형편이 되질 못했기 때문이었다.

티코의 식솔들이 베나트키 성에 들어온 지 채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루돌프 2세의 부득이한 요청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그들은 다시 베나트키 성을 떠나야만 했다. 하지만 루돌프 2세는 프라하에 티코의 식솔들이 기거할 수 있는 저택을 따로 마련해 주었다. 이 때 티코의 가장 훌륭한 제자 롱고몬타누스가 코펜하겐대학의 교수직을 얻게 되어 떠나는바람에, 티코는 케플러의 도움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상황이 되고말았다. 하지만 케플러는 티코가 구상하고 있던 수정된 지구중심설이아닌, 코페르니쿠스 태양중심설만을 끝까지 고집하며 대립했다.

티코가 54세가 되자, 그는 관측 자료를 보강하는 작업에서 한 걸음물러나 자신의 연구 성과를 정리하여 책을 편찬하기 위한 원고 작업에몰두하기 시작했다.
1601 년 4월, 케플러는 그라츠(Graz)로 떠났다. 티코의 식솔들이 베나트키 성에서 프라하로 이주할 시점에 케플러가 그라츠에 정착할 목적으로 떠난 적이 있었기에 이번이 두 번째였다. 하지만 그 해 8월이 되자, 케플러는 다시 티코에게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그라츠의 상황은 종교, 정치, 경제적 측면 모두에서 케플러가 정착할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조건을 제공하지 못하는 곳이 돼 버렸기 때문이었다.

황제 루돌프 2세는 케플러에게 티코와 함께 새로운 행성표를 제작해준다면 궁정수학자로 삼겠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궁핍한 처지였던 케플러에게는 반갑기 그지없는 제안이었으며, 그것은 곧 티코의 뒤를 이을 만큼 뛰어난 재능을 지녔다는 것을 인정받는 것이기도 했다. 물심양면으로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루돌프 2세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티코는 새롭게 완성될 행성표의 명칭을 '루돌프 행성표 (Rudolphine Tables)'라고 이름 지을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요청을 루돌프 2세에게 했으며,황제 루돌프 2세는 자신의 명성을 드높일 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에 흔쾌히 승낙했다.

1601년 10월 13일, 티코는 로젠베르크(Rosenberg) 남작의 저택에서 열린 만찬회에 초대를 받았는데, 당시 동석했던 사람들은 티코의 처지를위로하기 위해 과할 정도로 술을 권했다. 티코는 과음으로 인해 방광이터질 정도로 압박을 느꼈지만, 당시 예법에는 만찬의 주최자가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손님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은 큰 결례로 여겼던 터라, 티코는 계속 오줌을 참아야만 했다. 그 날 이후, 티코는 방광에 이상이 생겨 소변을 볼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그는 며칠 동안 고열로인해 잠을 자지도 못하고 정신까지 혼미해져 헛소리를 지르게 되는 상황까지 이르고 말았다.

10월 24일 밤, 기력이 다한 티코는 프라하에 머물고 있던 아내 키르스텐과 장남, 그리고 둘째딸을 제외한 나머지 자녀들과 제자들을 불러 모아 자신은 결코 후회가 없는 인생을 살았으며 부디 자신의 뒤를 이어 부단히 천체 연구를 계속해 달라는 말을 남김과 동시에 케플러에게는 특히 루돌프 행성표를 잘 완성해 달라는 당부를 전하며 숨을 거두었다. 향년 56세였다. 티코는 마지막까지 지구중심설을 견지했으나, 당대 최고수준의 관측 자료들을 확보해 천체물리학이 태동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으며, 전통적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칙들을 깨뜨려 천문학이 새로운 전환기를 마련할 수 있도록 돌파구를 제공한 관측천문학의 귀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