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천문학의 진화
히파르쿠스
히파르쿠스(Hipparchus, BC, 190-120)는 실용적인 목적에 중점을 두고 천체를 관측했던 바빌로니아(Babylonia)인들의 천문 자료들을 수집하고 정리하여 그 결과를 보다 세련된 학문으로 발전시킨 그리스 천문학자다.히파르쿠스가 등장함으로써 플라톤학파가 견지했던 현상을 구제하라”라는 명제는 새로운 상황을 맞게 되었다. 히파르쿠스는 논리성을 확보하기 위해 오직 기하학만을 의지하고 단지 추상적으로만 천문학을 연구하는 것은 극히 잘못된 연구 행태라고 비판하면서, 실제 관측을 수행하고 그 결과들을 분석하는 것이 천문학의 가장 기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바빌로니아인들이 행했던 관측 및 결과 분석 기법을 기하학과 접목시키려 했는데, 이와 같은 그의 천체 관측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는 플라톤의 관념적 연구에 대해 회의가 누적되는 가운데, 관측 자료의 실질적인 유용성이 증대되고 있는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제기된 것이었다.
히파르쿠스는 행성들의 역행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주전원'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창안했다. 주전원이 도입됨으로써 행성들의 역행현상 뿐만 아니라, 지구와 행성들의 상대적인 거리에 따른 행성들의 밝기 변화를 설명하는 것도 종전보다는 훨씬 더 용이해졌다.
히파르쿠스는 오랜 관측과 그 결과의 분석을 통해 별의 밝기 등급을 창시했으며, 이심원(圓)과 주전원 개념을 체계화시키는 작업에 특히 주력했다. 그는 관측과 이론을 겸비한 당대 최고의 천문학자로서 상당히 많은 연구 기초를 후대에 제공했으나, 여러 학파들이 저마다 다양하게 주장하고 있던 지구중심이론들을 하나로 수렴하여 뚜렷한 계통을 수립할 수 있는 천문학으로 이끌지는 못했다.
한편 천문학 연구에 있어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자들의 공통 요소를 살펴보면, 각 학파들이 우주 모형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대체로 지구를 우주의 중심에 두었다는 것 말고는 동일하게 적용하고 있는 표준을 찾아볼 수가 없다. 이처럼 지구를 우주의 중심에 두었다는 것 말고는 공유할 수 있는 계통적 표준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각자 형이상학적 요소들을 마음대로 끌어들여 저마다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듯 천상계를 자의적으로 해석해 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실험과 관찰에 있어서도 확실한 신뢰를 제공할 만큼의 공약(公)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연구 방법의 선택도 상당히 자유롭고 다양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선행 천문학자들의 연구 성과들이 후속적(後) 맥락을 구성해 후발 천문학자들에게 조직화된 공약을 제공했다고 볼 수가 없다. 만약 각 시대별 천문학적 요소들의 합류에 의해 당시 천문학이 정교화 과정을 제대로 거쳤다면, 분명 뚜렷한 맥락을 지닌 모종의 후속적 패러다임이 발견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 천문학자 그룹들은 우주를 구성하는 물질과 천체들의 운동 원리를 저마다 달리 해석하고 그것을 끝까지 견지함으로써 후대에 출현하게 될 천문학자 그룹들에게 확실한 공약으로서의 체계적인 지구중심설 모델을 넘겨주지 못하고 말았다. 나름 체계화된 시스템이 갖추어진 것은 프톨레마이오스가 비로소 등장함으로써 이루어졌다.
프톨레마이오스
프톨레마이오스(Claudius Ptolemaios, 907-168?)는 천문학을 형이상학으로부터 탈출시켜 수리적(數理的)으로 정리함으로써 천문학의 새 지평을 열었다. 프톨레마이오스가 오랜 관측을 통해 수집한 자료들을 과거의 자료들과 함께 정리하고 수리적으로 논증한 알마게스트(Almagest)는 원래 제목이 천문학 집대성(Megale Syntaxis tes Astoronomias)』이었는데, 이 책은 그의 점성학 백과사전인 『테트라비블로스(Tetrabiblos)』의 자매편이었다. 그런데 『알마게스트』가 유럽에 처음 소개되었을 때, 당시 학계에서는 '지나치리만큼 난해한 수학적 내용들로 가득한 책'이라고 일컬었다고한다.
프톨레마이오스는 기존의 그리스 자연철학자들이 학문적 측면에서만 천상계를 해석하려 했던 것과는 달리, 천문학의 실용적 측면을 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의 탄생일과 관련된 별자리를 통해 운명을 점친다든지, 왕위를 계승하는 대관식은 언제가 좋은지, 행성이 어떤 운동을 할 때 길(吉)하고 불길(吉)한지 등을 알아보는 것에 천문학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이전의 천문학자들이 지향했던 '전체적으로 간결하면서도 완벽한 우주 모형의 완성을 굳이 무리하면서까지 추구하려하지 않았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연구 초기에 아리스토텔레스 우주 모델과의 융화를 잠시나마 시도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끝내 행성 각각의운동 방식에 대한 분석과 정리에만 치중했다. 그 이유는 프톨레마이오스가 연구를 진행시켜 가는 과정에서 얻게 되는 결과들을 정리하면 할수록 도저히 아리스토텔레스 우주론과는 융화될 수 없음을 발견했기때문이었다. 이런 사실들은 1967년에 발견된 프톨레마이오스의 저작행성의 가설 (Planetary Hypotheses)』의 내용을 통해 확인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관측을 통해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규칙성에 입각한 행성계를 만들려고 노력했는데, 그런 목적에 이끌려 행성의 속도,크기와 밝기, 역행 등을 설명하기 위해 편심(心)과 주전원(圓)을 다양한 방식으로 적용시켰다.
다음 그림에서 볼 수 있듯 행성들이 회전하는 천구의 중심은 지구에서 약간 비껴나 있는데, 이 지구의 위치가 바로 편심이다. 편심은 지구에서 행성들을 관측할 때, 행성들의 크기가 조금씩 달라 보이게 되는것과 천체 회전의 중심(기하학적으로 떨어진 거리가 서로 동일하다는 의미를 지니는 중심일 뿐, 특별한 의미가 없는 중심점)을 기준으로 행성의 회전 속도가 일정하더라도, 지구에서 보게 되면 위치에 따라 행성들의 속도가 달라져 보이게되는 현상을 설명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이렇게 편심을 도입한 이유는 지구 주위를 행성들이 공전한다는 것과 행성들이 원궤도로 등속운동을 하고 있다는 원칙을 깨뜨리지 않기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되니 자연스레 '지구 중심의 원운동'이라는 원칙은 깨져 버렸다. 그렇다고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런 모형이 행성의 크기와 운동 양상을 완벽하게 설명해 주는 것도 아니었다. 왜냐하면이런 모형에 따른다면 때때로 달의 크기가 어떤 곳에서는 다른 곳에 있을 때와 비교해서 두 배 가까이 크게 보여야만 했는데, 실제 그런 현상은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이런 모순들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무시했다. 단지 프톨레마이오스는 행성의 역행과 불규칙한 운동을 설명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심원 궤도에 주전원을 올려놓고 편심을 도입했을 뿐이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주전원 모델에서 특히 눈여겨 볼 점은 지구와 태양을 잇는 선이 항상 행성과 주전원의 중심을 잇는 선과 평행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하는 주기가 주전원을 그리며 돌고 있는 행성의 회전 주기와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편심을 적용시킨 그림과 이심원을 돌고 있는 주전원 운동에 대한 그림을 교차시켜 보면 상당히 복잡해져 버린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프톨레마이오스는 천체들의 운동에 관한 속성을 규명하는 데 주력했지, 완벽한 균형과 조화를 갖춘 행성계 모형을 추구하는 데 최종 목표를 둔 것이 아니었음을 상기하자. 그런 의도는 알마게스트』의 진술 과정에서 줄곧 표현되고 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시스템에서 태양은 이심원 궤도를 1년 동안 한 번회전한다. 이것은 태양의 연주 운동에 관한 것인데, 그럼 태양이 하루에 한 번씩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리고 태양뿐만 아니라, 행성들과 별들 역시 하루에 한 번씩 동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데 이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프톨레마이오스는 태양, 행성들, 별들의 이심원 궤도가 지구 주위를 하루에 한 번씩 회전하는 것으로 설명했다. 즉 이심원 궤도 자체가 지구 둘레를 하루에 한 번 회전하는 것으로 일주 운동의 원리를 설명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태양의 경우에는 그리 복잡하지 않게 설명이 가능했으나, 행성들의 경우는 좀 달랐다. 특히 화성의 경우에는 너무 복잡해서 제대로 설명하는 게 불가능했다. 결국 프톨레마이오스는 '화성의 회전이 등속 운동을 하지 않는 것 같다'는 결론을 제시하며 자신이 파 놓은 함정으로부터 빠져 나가 버렸다.
프톨레마이오스는 관측된 현상을 구제하기 위한, 즉 관측된 현상을기하학적으로 정확하게 설명하기 위한 또 하나의 시도로 이심점(離心點,equant)을 제안했다.
이심점은 행성들이 돌고 있는 이심원의 회전 중심에서 지구의 위치와는 반대쪽에 위치한 대척점(點)인데, 이심점에서 관측되는 행성의운동 속도는 일정하다고 간주된다. 프톨레마이오스는 행성들이 본연적으로는 일정한 운동 속도를 가진다는 점을 만족시키면서도 지구에서관측될 때 행성들의 운동 속도가 빨라지거나 느려지게 나타날 수 있음을 설명하기 위해 이심점을 제안한 것이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런 이론들이 지금의 시각으로는 상당히 허황된 것으로 보이지만, 당시 직업적 천문학자들과 점성술사들에게는 상당히 각광을 받았다. 왜냐하면몇 가지 풀지 못한 문제들이 있다 할지라도 알마게스트』가 각 행성들의 운동만큼은 나름 수학적 논증들을 통해 제대로 설명하고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이런 신뢰에 힘입어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은 오랫동안 성공을 이어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