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플라톤주의자들의 사상과 우주론
갈릴레이를 제외하면 근대 천문학을 개척했던 학자들 대부분이 신학자 또는 신적 영감이 충만했던 사람들이었다. 당시 교육기관들 대다수는 신학교 형태를 띠고 있었는데, 천문학은 거의 모든 신학교에서 필수과목으로 강의되고 있었다. 코페르니쿠스, 티코, 케플러 등 많은 천문학자들이 어린 학창시절을 신학교에서 보냈다. 이것은 르네상스 시대를 주도했던 신플라톤주의 학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신플라톤주의에의해 근대 천문학이 어떻게 태동되었는지 그 계보를 한번 살펴보자.
르네상스 시대에 플라톤주의의 새로운 출발점을 제시한 인물은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h, 1304-1374)였다. 계관시인(桂冠詩人)의 칭호까지 얻었던 그는 르네상스의 문턱에서 당대의 정신세계를 면밀히 분석했다. 페트라르카는 그리스 고전 연구에 있어서는 광적(인 인문주의자(文義者)였으나, 신앙에 있어서는 독실한 기독교도(基督敎徒)였다. 그는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BC, 106-43)와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AD. 354-430)를 동일하게 진리의 표준으로 삼고, 고대 가치관과 기독교 이상 사이에서 조화로운 융합을 시도했다. 그런데 14세기 중반 이탈리아에서는 그리스어를 제대로 아는 사람의 거의 없었다. 그래서 페트라르카에서 출발한 이탈리아의 인문주의는 전적으로 라틴어로쓰여진 작품들을 복원하는 것에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정작 정통이라고 할 수 있는 고대 그리스어와 여러 철학자들의작품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그로부터 반(半)세기가 더 지나서야 이루어졌다. 실제 유럽에서 그리스 고전(古典)의 본격적인 부흥이 시작된 것은 동로마제국(Byzantine Empire) 멸망(1453년) 전후로 다수의 학자들이 이탈리아로 유입되면서부터였다.
페트라르카의 학문을 계승한 대표적인 학자로서 니콜라우스 쿠자누스(Nicolaus Cusanus, AD. 1401-1464)가 있다. 프로클로스(Proklos, AD, 410-485)의 사상은 쿠자누스에 의해 최고의 정점에 이르렀다. 프로클로스는 대표적인 신플라톤주의 학자인데, 그의 철학은 중세를 거쳐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피렌체 아카데미아를 통해 유럽 전역으로 전파되었다. 그의 사상은 당시 거의 모든 학문에 영향을 끼칠 정도였다.
한편 쿠자누스는 프로클로스적 이념으로 무장하고 아리스토텔레스적 스콜라주의(scholasticism)를 철저히 혁파하고자 했다. 그는 자신의 저서 박학한 무지(De docta ignorantia)』를 통해 신은 '절대적'인 존재이며, '수학적 사유방식을 통해서만 이 세상에 대한 이해를 올바르게 할 수 있다는 견해를 펼쳤다. 즉, 쿠자누스는 신학적 영감과 기하학적 요소를 함께 강조함으로써 신플라톤주의를 그대로 실천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사람들이 오랫동안 견지한 지구중심적 사고에 대해 “그 어디에나 존재하게 될 자는 스스로가 중심에 존재한다고 믿는다"라는 지적을 통해 세상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지니고 있던 '자신이 살고 있는 지구가 곧 이 세상의 중심이다'라는 인식은 분명 경계할 만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의 이런 학문적 태도는 철저히 형식적 개념의 틀 안에서만 사유가 가능했던 스콜라학자들의 방식과는 상당히 대조를 이루는 것이었다.
쿠자누스 이론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신과 인간, 단일성과 다양성, 천체와 지구의 관계 등과 같은 주제들을 수학적인 방법, 특히 기하학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려 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온전히 플라톤적 방식이다. 그의 이런 접근법은 이전의 학자들로부터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원래 모든 수학적 대상들은 유한한데, 그런 유한한 것을 탐구하여 최상의 것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일단 유한한 수학적 대상들 간의 속성과 관계를 완전하게 모두 고려해야만 한다'고 강조하면서, 그런 과정을 거쳐서 이해된 것들을 다시 무한한 대상으로 알맞게 전이시킴으로써 비로소 '무한한 단순함'을 이끌어 낼 수가 있다고 주장했다.
쿠자누스는 박학한 무지에서 지구의 위치 설정에 대해 "마치 땅(지구)이 우주의 중심이 아닌 것처럼, 항성들의 궤도(하늘) 역시 우주의 원주는 아니다. 비록 땅과 하늘의 관계를 비교할 경우에 땅은 중심으로, 하늘은 원주에 더 가깝게 보인다고 할지라도…”라는 설명을 통해 선행 학자들의 이론들을 부정했다. 그는 특히 만들 가운데 땅은 하나의 점에 불과할 뿐, 중심이 아니라고 확실하게 못을 박았다. 이런 관점은 훗날 코페르니쿠스가 가설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는 이전의 신플라톤주의자들과는 달리 기독교 신학에 위배되는 것들을 단호히 거부했는데, 창조의 영역에서 절대자와 피조물 간에는 그 어떤 중개자도 필요치 않을 뿐더러, '우주혼(anima mund)'이라는 것도 결코 존재하지도 않고, 신들 역시 다양하게 존재하지 않는다고 역설했다.
한편 이 시기에 신플라톤주의 학자들에 의한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에 대한 비판이 다각도로 이루어졌는데, 플레톤(Georgios Gemistos Plethon, AD. 1355-1450)은 그의 저서 『플라톤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차이(De Platonicae et aristotelicare philosophiae differentia)』를 통해 아리스토텔레스가 고대 헬라의 전통적 세계관을 따르지 않고 자연주의적 입장만을 견지한 채, 독자적인 사유 방식을 채택했다는 점을 강하게 비판했다. 플레톤의 이런 사상은 더욱 발전하면서 르네상스 시대의 사상가들로 하여금 헬레니즘 (Hellenism)으로 귀환함에 있어, 그 기조가 이젠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닌 플라톤으로 초점 지워지도록 유도했을 뿐만 아니라, 피렌체 아카데미아(Firenzer Academia: 르네상스의 중심지 피렌체에서는 아카데미아를 중심으로 사상과 학문이 연구되고 발전했으며, 이는 메디치 가문이 아카데미아의 설립을 주도하면서 고전 연구를 독려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는데, 가톨릭교회 당국은 이러한 연구 활동들을신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인간정신의 자연스러운 구현 과정'으로 간주하고 널리 장려하고 있었다)가 프로클로스의 이념을 기치로 삼아 신플라톤주의를 지향하며 나아가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이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신플라톤주의 사상이 기독교와 결탁하는 사례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마르실리오 피치노(Marsilio Ficino, 1433-1499)는 신플라톤주의를 '기독교를 위한 보조 수단'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그는 오랫동안 기독교 사상과 잘 융합해 왔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들이 이젠 오히려 종교적 신앙심을 약하게 만든다고 비판하면서 그 대안을 자신의 저서 『플라톤 신학(Theologia Platonica)』을 통해 소개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인간은 우주의 중심이며 영원한것과 사라지는 것들 사이의 연결고리'라고 주장했다. 실제 13세기에 아리스토텔레스 자연철학이 자유주의적 학문 경향을 지닌 대학들 사이에서 한창 유행했을 때에도 일부 성경의 내용과 상충되는 부분들에 대해서는 보수주의 신학자들의 거센 공격을 피할 수가 없었다.
피치노는 플라톤의 『티마이오스』를 번역하고 주해(註解)함으로써 ‘정통 기독교 사상의 연구'라는 기치 아래 이교도 세계관의 철학적가치를 증명했으며, 그 과정에서 추출된 결과들을 자신의 신학과 우주론의 연구 토대로 삼았다. 피치노는 『티마이오스』와 관련해 오랫동안학자들의 관심의 초점에 자리잡고 있던 '만물의 창조자 데미우르고스신화의 본성과 기능'에 대해 특히 주목했는데, 그런 주제에 대한 기독교적 해석의 가능성 및 창세기(世記)에 소개된 기독교 창조설과의 일치가능성 등을 두루 살핌으로써 우주 창조를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다양한 기초를 제공했다. 한편 피치노는 광범위한 사상적 유산들을 응집력 있고 생기가 있는체계로 재구성하여 그 결과로부터 추출된 새로운 의미를 베르길리우스(Vergilius Maro, BC, 70-19)와 키케로에게로 스며들게 하였다. 그리고 그의피렌체 아카데미아에서 이루어진 신플라톤주의적 철학은 플라톤을 철학자로서가 아니라 우주론자나 신학자로 간주했으며, 플라톤주의와 신플라톤주의를 따로 구분짓지도 않았다. 하지만 구성적인 측면에서 플라톤적인 것과 플로티노스(Plotinos, AD, 205-270. 신플라톤주의 창시자라고 일컬어짐적인 것 후기 그리스 우주론과 기독교 신비주의, 호메로스(Homeros)의 신화와 유대교 신비주의, 아라비아의 자연과학과 중세 스콜라철학등을 함께 결합시킴으로써 다소 형이상학적인 경향을 띠고 있다는 약점을 내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