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동양의 태양중심설 전래 과정

캠퍼고군2 2022. 4. 28. 15:44

중국

중국의 근대 과학계는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중국명 利瑪竇, 1552-1610),아담 샬(Johann Adam Schall von Bell, 중국명 湯若望, 1591-1666), 페르디난트 페르비스트(Ferdinand Verbiest, 중국명 南仁, 1623-1688)에 이르는 3세대에 걸친 예수회 서양 학문 흡수기를 가지는데, 내부적으로는 서양 선교 세력 간의갈등(17~18세기에는 도미니크派, 프란치스코派, 그 후 19세기 초에는 프로테스탄트 세력과의교리 논쟁)과 외부적으로는 중국 내 반(反)서학운동 등에 의해 시달려야만했다.

원원(阮元, 1764-1849)이 1799년에 저술한 『주인전(傳)』에는 중국 및서양 천문학자 몇몇을 논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코페르니쿠스(중국명 歌를 언급하는 대목이 있다. 그런데 그는 18세기말 예수회 소속 미셀브누아(Michel Benoit, 중국명 蔣友仁, 1715-1774)가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을 처음 중국에 소개한 것을 비롯해 그 당시까지 중국에 소개된 서양학문 대부분을 가리켜 중국의 기존 학설들을 도용해서 이름과 모양만바꿔 놓은 것들이라며 비판했다. 그리고 태양중심설과 관련해 '과거 湯若望(아담 샬)은 歌白尼(코페르니쿠스)를 지구중심 주창자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왜 蔣友仁(미셀 브누아)은 歌白尼(코페르니쿠스)를 태양중심설 주창자로소개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이로 인해 서양 학문은 결코 신뢰할 만한 것이 못 된다고 주장했다. 이런 모습은 난징조약(체결1842년이전까지 서양 학문에 대해 취하고 있던 중국 학계의 불분명한 태도를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이런 복잡한 상황들로 인해 중국 내 코페르니쿠스 이론의 본격적인 도입은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다.

1543년, 규슈(九州)의 다네가(種子島)에 포르투갈인이 내항하면서 조총과 탄약의 제조법이 소개되었는데, 일본 본토가 아닌 곳에서는 일본인과 서양인의 접촉이 그 이전부터 있었으나, 직접 상륙하여 본격적으로서양 문물이 전수되기 시작한 것은 이 때부터다.

1638년, 중국인과 네덜란드인이 무역을 목적으로 나가사키(長崎) 부근에 거주하게 되면서부터 중국과 서양 서적들이 다량 수입되는 과정을통해 서양 근대 과학이 조금씩 일본 학계에 소개되었다. 그러다 예수교에 대한 박해가 진행되면서 서양 언어를 연구하는 것 이외에는 서양 학문과 접촉하는 것을 금지하는 강력한 제재가 시행되기에 이르렀는데,1720년경에 예수회 선교사들에 대한 통제가 느슨해지자 서양 학문에대한 연구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도쿠가와 요시무네(德川)가 집권하던 시기 (1716-1745) 의 일본의 실용천문학자들은 예수회 학자들의 논문을 직접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그들은 언어 장벽으로 인해 상당히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런 상황은당시 일본의 실용 천문학자들이 조선의 학자들과는 달리 중국으로부터수입되는 중국인 학자의 손을 한 번 거친 천문학 관련 서적들에 대해굳이 의존하지 않겠다는 경향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중국의 과학 서적들이 일본으로 전혀 수입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는데,당시 서양 천문학은 크게 두 가지 경로를 통해 일본에 전래되었다.

(1) 중국 소재 예수회 선교사들 또는 그 추종자들로부터 입수된 자료(2) 일본 소재 서양학자들과의 직접적인 접촉 또는 유럽에서 직접 전래된 자료

먼저 첫 번째 경우를 살펴보면, 중국에서는 '예수회 선교사들의 거의 독점적인 서양 문물의 전파'라는 특이성으로 인해, 당시 코페르니쿠스 이론의 수용이 상당히 더디게 진행되었다. 왜냐하면 예수회 학자들은 코페르니쿠스의 행성계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760년경에 이르러 미셀 브누아(Michel Benoit)에 의해 코페르니쿠스 이론이 중국에 소개되자 중국 학계는 한동안 격심한 논쟁에 휩싸이기도 했는데, 이 사건의 여파가 일본에 영향을 미칠 만큼 양국 간의 소통이 원활한 시기는 아니었다.

기록상으로만 본다면 1846년 막부(幕府) 소속 천문학자 시부카와 가게슈케(渋川景佑, 1787-1856)의 저서 『새로운 기법에 의한 달력에 관한 논문의 속편을 통해 코페르니쿠스 이론이 처음 소개되었지만, 태양중심설과 관련된 몇 가지 정보들은 벌써 그 이전부터 서양 학문과의 접촉을 통해 전래된 상태였다. 그에 앞서 시즈키 타다오(志忠雄, 1760-1806)는 자신의 저서 『달력과 관련된 현상에 대한 새로운 논집」에서 중국을 통한 예수회 서적에서 태양중심설과 관련된 삽화를 본 경험이 있음과 1780년대에 자신이 번역한 영국의 존 케일(John Keill, 1671-1721)의 작품을 통해 코페르니쿠스 이론에 대해서는 이미 인지하고 있었음을 밝혔다.

이처럼 일본이 달력 제작과 관련된 서양의 정보를 중국을 경유하는 과정을 통해 어느 정도 차용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코페르니쿠스 이론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중국 학계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았다고 할 만한 결정적 사례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것은 중국에 의해 동양적 해석으로 재탄생한 코페르니쿠스 이론이 당시 일본으로전해진 바가 없음을 의미한다.


두 번째 경우인 일본이 서양과 직접 접촉함으로써 서양 천문학이 수용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먼저 예수회 선교사들이 일본에서 활동하던시기에 우주론과 관련된 아리스토텔레스 저서들을 본격적으로 유포시키면서부터 서양 천문학의 전래는 시작되었다. 그 후 스페인의 페드로고메즈(Pedro Gomez, 1755-1852)에 의해 코페르니쿠스 이전의 천문학을 정리한 책 『천구(天球, De sphaera)』라는 예수회 학교에서 사용하던 교재와예수회에서 탈퇴한 크리스토바오 페레이라(Christovao Ferreira, 1580 – 1650)의 연구 내용을 담고 있는 『서양 천지학의 결정적 주석』이라는 일본 유학자가 주석을 단 책들이 잇달아 소개되었다.

이 책들은 모두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을 기본으로 하여 하나같이지구의 자전을 거부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고전 천문학자들의 이론을 소개하면서 지구가 자전한다면 지구상의 모든 물체들은 바깥쪽으로날아가 버릴 것이라는 내용을 주요 핵심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이책들은 모두 코페르니쿠스나 태양중심설에 관한 내용들은 수록하고 있지 않는데, 아마도 코페르니쿠스 이론이 유럽 전역의 종교계와 학계로부터 완전한 승인을 받기 이전에 아시아로 소개된 것들이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한편 네덜란드 상인들과 교류가 있던 나가사키의 니시카와 마사요시( 1694-1756)는 서양 학문에 대한 식견을 인정받아 막부에 소속되어 천문학을 연구했는데, 그는 티코 브라헤의 우주론에 입각한 학설을 펼쳤다.

당시 일본 학계에 코페르니쿠스 이론을 처음으로 소개한 것은 비(非)천문학자들에 의해서였다. 그들은 서양 서적을 번역하며 생계를 이어가던 전문 번역가들이었다. 코페르니쿠스와 관련된 최초의 번역 작업은 모토키 료에이(本木良永, 1735-1794)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의 네덜란드 서적 번역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띠고 있는데, 그것은 코페르니쿠스 태양중심설의 일본 내 첫 기점(起點)을 찍었다는 것, 그리고 일생동안 서양 언어 연구와 관련해 획기적일 만큼 진일보한 성과들을 이루어 냈다는 것, 이 두 가지 상징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료에이는 나가사키 토박이 번역가 집안에서 3세대에 걸쳐 가업을 잇던 사람이었다. 그는 일생 동안 천문학과 지리학 분야에서 다수의 번역서를 출판했다. 이와 함께 달력과 관련된 현상에 대한 새로운 논집』을 저술했던 타다오 역시 나가사키 토박이면서 번역가 집안 출신이었다.

타다오는 원래 료헤이의 문하생이었으나, 18세에 자신의 가업을 포기하고 평생 자연철학과 우주론에 관심을 두며 연구자의 길을 걸었다. 료에이는 처음부터 서양 언어 전문 번역가였기에 중국 서적에 기록되어 있던 천문학적 내용들은 조금도 알지 못했으며, 코페르니쿠스나 티코와 같은 서양 천문학자들의 이름과 관련된 중국식 음역이나 책력(曆)과 관련된 천문학 전문 용어들에 대한 구체적인 검증 작업도 전혀 수행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자신만의 기술적(記述) 방법과 음역 기준에 따라 작업했다. 이와 같은 서양 과학서적의 번역 작업은 여러 후대 번역가들에 의해 꾸준히 다듬어지면서 발전해 갔다.

일본에서 태양중심설의 전래가 다소 지연되었던 것은 18세기 초까지 이루어졌던 쇄국정책(國政策)과 언어장벽이유 때문이었이라는다. 그래서 코페르니쿠스 이론의 소개가 천문학자들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고, 이처럼 전문 번역가들에 의해 선도되었음은 일편 당연하면서도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일본 학자들의 코페르니쿠스 이론에 대한 주요 관심사는 '동양의 자연철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자연현상과 관련된 물리 • 역학적 특징'이라는 범주에만 집중되었다. 그래서 코페르니쿠스 이론과 관련된 것들은 단지 다양하게 소개되던 서양 학문들 중 하나일 뿐으로만 인식되고 말았기에, 천문학과 관련해 새로운 연구 동기나 유행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더군다나 그 시기의 일본 천문학자들은 서로 다른 두 이론을 겨냥해 상호 논박할 만큼의 풍부한 관측 자료나 수학적 기교를 지니고 있지도 못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점차 시간이 흘러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은 특별한 분쟁 없이 비교적 자연스럽게 흡수되는 과정을 통해 일본 학계에 자리 잡았다.

이처럼 서양 학문의 우수성은 직접 교역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선교사들의 작품들이 조금씩 유입되는 과정을 통해 일찍이 인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따른 근대 과학의 기초교육은 한참이 지나서야 이루어졌다.

일본인이 자국의 교육기관을 통해 서양의 근대 학문을 제대로 습득하기 시작하는 것은 19세기 후반부터였는데, 폐번치현(瀋置縣: 메이지 유신 시기인 1871년 8월 29일, 이전까지 지방 통치를 담당하였던 번을 폐지하고, 지방통치기관을 중앙정부가 통제하는 부(府)와 현(縣)으로 일원화한 행정개혁) 이후, 서양 학문 쪽으로 진출했던 사람들은 사무라이) 출신의 자제들이 특히 많았다. 그들이 훗날 미국과 유럽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일본은 근대 과학의 싹을 피우게 되는데, 코페르니쿠스 이론도 그 시기에 이르러서야 정통 학문으로 연구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지전설을 주장한 학자는 김석문(金錫文, 1658-1735)이다. 그는 1697 년에 자신이 편찬한 역학이십사도총해二十四圖解)』를 통해 지구, 달, 태양,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의 상대적인 크기를 제시하고, 지구가 하루에 한 바퀴 자전하면서 일 년에 총 366번의 회전을 한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태양 주위를 행성들이 공전하고 있으며, 이것은 다시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한다고 설명했는데, 이것은 티코의 행성계에서 볼 수 있는 구조다. 그는 처음에는 중국 성리학을 기초로 천문 현상을 이해하려 했다. 그러나 청나라에서 활동했던 이탈리아 예수회 선교사 자크 로(Jacques Rho, 중국명 羅雅谷, 1593-1638)의 『오위역지(五緯)』를 접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그 책은 프톨레마이오스와 티코의 이론들을 수록하고 있었는데, 김석문은 티코의 행성계를 더욱 신뢰했다. 그러나 티코가 지구의 자전을 거부했다는 점에 찬동하지 않고, 낮과 밤은 분명히 지구가 자전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하지만 김석문의 이런 주장은 자신이 천체들을 직접 관측한 결과들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단지 서양 천문학 이론들을 분석해서 나온 결과일 뿐이었다.

그 후 박지원(朴源, 1737-1805)의 『열하일기(熱河日記)』중「곡정필담]에서 지전설과 관련된 내용이 다시 등장한다. 박지원이 청나라를 방문했을 때(1780년 정조 4년), 그가 중국의 왕민호 필담(筆談)을 나와누는 과정에서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의 지전설 언급하게 되는 을데, 이 필담 중에 홍대용의 지전설과 서양의 지전설을 비교하는 대목이 나온다. 당시 박지원은 홍대용이 지전설을 독창적으로 창안했다는 의미로 설명하면서, '서양 사람들은 지구가 둥글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자전한다는 사실은 알지 못한 것 같은데, 자신의 벗인 홍대용은 이미 예전에 지구의 자전을 제안한 적이 있다'고 소개했다. 그런데 1766년에 홍대용은 북경에서 서양 선교사들을 만난 적이 있었다. 이를 두고 일본의 중국과학사학자 야우치 기요시는 홍대용이 그 당시 서양 선교사들로부터 지전설에 대한 정보를 이미 들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1968년에 논문을 통해 발표한 바가 있다.

홍대용의 문집에는 당시 서양 선교사들과 나눈 대화들이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서양 선교사들이 지전설을 언급하긴 했으나 옳은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게다가 정황상으로 볼 때, 교황청의 입장을 대변하던, 그것도 갈릴레이를 가장 선봉에서 공격했었던 예수회(Jesuit) 소속 선교사들이 내심 지전설이 옳을지도 모른다는 생각했을지라도) 당시 이단으로 규정하고 있던 태양중심설의 기본 원칙인지전설이 옳은 가설이라고 당당히 홍대용의 견해에 힘을 실어 주었을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홍대용은 대화체 문답식으로 기술한 '의산문답(山問答)』을 통해 낮과 밤은 땅이 회전하면서 생긴다는 지전설과 해와 달 속에도 생명체가 살고 있을 것이라는 우주인설(宇宙人), 그리고 무한우주론(無論)을 제안했다. 이에 덧붙여 가볍고 빠른 천체는 자전과 공전을 함께 할 수 있는 반면, 지구는 무겁고 느린 것이라 자전은 가능하지만 공전은 불가능하다고 피력했다. 홍대용이 서양 과학의 중요성을 크게 깨닫고 그것을 수용하고 발전시키려 했던 최초의 조선인이라고 할지라도, 지전설을 처음 제안하고 그 내용을 정리해 기록으로 남긴 학자는 김석문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홍대용의 '의산문답에서 설명하고 있는 천체들의 운동 방식 역시 티코의 행성계와 동일한데, 이것은 김석문의 「역학이십사도해에서 소개되는 내용과 크게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홍대용은 오위역지내용에 찬동하면서도 지전설의만큼은 옳은 것이라고 결론 내렸던 것이다.

한편 홍대용은 '의산문답』에서 '지구가 하루에 한 바퀴 도는 것이 무수히 많은 천체들을 포함하고 있는 무한한 우주가 지구 둘레를 한 바퀴 도는 것보다 더욱 이치에 합당하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런 문구는 우연하게도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제1권에서 소개되는 내용과 거의 흡사하다.

결론적으로 홍대용이 설명하고 있는 지전설의 일부 요소 및 행성들의 위치와 공전에 관한 내용들은 자신이 중국에 들렀을 때, 서양 천문학을 접하면서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은 결과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17~19세기 조선의 학자들은 중국이나 일본처럼 서양인들과의 긴밀한 접촉을 통해 선진 과학을 수용하고 분석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다. 중국을 방문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중국인의 손을 한번 거친 자료를 통해 서양 학문을 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당시 조선의 분위기는 그만큼 열악했다. 우리나라에서 구체적인 코페르니쿠스 이론의 이해와 수용은 하는 수 없이 대한제국(帝國)시대까지 기다려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