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교회의 반응
16세기 유럽 학문의 한 축을 담당했던 프로테스탄트 계열() 대학들의 학풍을 설계하고 관리·감독하던 필립 멜란히톤(Philipp Melanchthon, 1497-1560)이 대립관계에 놓여 있는 가톨릭교회의 대표학자인 코페르니쿠스를 상당히 높이 평가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렇다고 멜란히톤이 코페르니쿠스 이론을 전적으로 지지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어릴 적부터 다방면으로 비범한 재능을 지녔던 그는 천성이 온화한 성격으로 결단력이 부족했으며, 신학적인 표현에 있어서도 타협적이었다고 전해진다. 그가 코페르니쿠스 이론에 대해 취했던 입장을 살펴보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최측근이었던 멜란히톤은 수학과 천문학을 학문적 측면에서 상당히 높게 평가했는데, 루터와 멜란히톤이 함께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비텐베르크대학(University of Wittenberg:1817년에 University of Halle와 합병했으며, 1933년 마르틴 루터 탄생 450주년을 기념하여 교명이 Martin Luther University of Halle-Wittenberg 로 바뀌었음)은 예전부터 천문학 연구를 적극 장려하며 지원하고 있었다. 멜란히톤과 그 동료들이 신의 전지전능함을 드러내 주는 '천체운동의 질서'를 이해하는 수단으로 전통적 원칙에 어긋나는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을 활용했었다는 사실은 다소 의외라고 할 수 있다. 천문학 연구가 활발했던 비텐베르크대학에서는 유독 코페르니쿠스 시스템에 대한 논쟁이 활발했다. 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프로테스탄트 내부의 핵심 인물 몇몇을 제외하고는 코페르니쿠스 이론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다.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의 편찬 과정에서 큰 역할을 수행했던 레티쿠스가 코페르니쿠스를 알게 된 것도 비텐베르크대학이었으며, 코페르니쿠스의 행성계를 이용해 에페메리데스(efemérides, 천문표)를 만들었던 에라스무스 라인홀드(Erasmus Reinhold, 1511-1553) 역시 비텐베르크대학의 교수였다. 레티쿠스가 태양중심설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코페르니쿠스를 찾아가기 전까지 그는 비텐베르크대학에서 멜란히톤과 교분을 쌓으며 『알마게스트』를 강의하고 있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접한 후, 그에 동조하여 새로운 세계관에 눈을 뜨게 된 레티쿠스는 비록 '독일의 교사(Praeceptor Germaniae)'라고 칭송되던 멜란히톤의 우주관을 태양중심설로 전향시킬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멜란히톤의 학문적 권위를 빌어 프로테스탄트 계열 대학들에게 코페르니쿠스 이론을 전파할 수 있는 돌파구를 마련할 수는 있었다. 그렇다고 당시 비텐베르크대학을 비롯한 프로테스탄트 계열 대학들의 모든 학자들이 코페르니쿠스의 새로운 이론에 대해 쉽사리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지는 않았는데, 첫 번째 이유는 태곳적부터 확고한 믿음으로굳어져 있던 아리스토텔레스 원칙들을 쉽게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고, 두 번째 이유는 성경의 몇몇 구절(여호수아 제10장 제12~13절. “신께서 아모리족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으로 넘겨주시던 날, 여호수아가 신께 아뢰었다. 그는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외쳤다. '해야 기브온 위에 달아, 아얄론 골짜기 위에 그대로 서 있어라.' 그러자 백성이 원수들에게 복수할 때까지 해가 그대로 서 있고, 달이 멈추어 있었다. 이 사실은 야사르의 책에쓰여 있지 않은가? 해는 거의 온종일 하늘 한가운데에 멈추어서, 지려고 서두르지 않았다. 전도서제1장 제4~5절 : 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오지만 땅은 영원히 그대로다. 태양은 뜨고 지지만떠올랐던 그 곳으로 서둘러 간다."하지만 이런 구절들이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모든 행성들이지구 주위를 공전한다는 사실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것은 아니다. 성직자들의 의도에 의해 그렇게해석되어진 것일 뿐이다)들과도 상치(相)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시기의프로테스탄트 계열 천문학자들은 오지안더(A. Osiander)가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의 서문에서 그어 놓은 제한선을 굳이 넘어서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심점(equant)을 제거한 것을 비롯해 몇몇 골칫거리들을 해결한 코페르니쿠스 시스템을 부분적으로 응용하면서도 고전 천문학의정통만큼은 결코 깨뜨리려 하지 않았다.
당시 천문학계가 이심점을 제거하기 위한 작업에 특히 매진했던 이유는 행성이 박혀 있는 천구가 실제 천체들의 공전 중심을 기준으로 빨라지기와 느려지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면서 돈다는 것은 전통 물리학의 원칙에 입각하면 절대로 발생할 수 없는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티코는 이심점을 도입하지 않고서 행성의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소주전원(小周圓, miniepicycle)을 도입한 새로운 시스템을 제안하기도 했다.
비텐베르크대학을 비롯한 프로테스탄트 계열의 대학들이 보여 줬던 일부 상황만을 고려해 새로운 행성계의 출현에 대한 프로테스탄트 계열의 학자들의 태도가 가톨릭계열 학자들보다 상대적으로 더 우호적이었다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 시기의 코페르니쿠스 이론에 대한 프로테스탄트 계열 학자들의 공격은 가톨릭 계열을 학자들보다 구조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로테스탄트 계열의 학자들의 공격은 가톨릭 계열의 학자들의 공격보다 효과가 뚜렷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코페르니쿠스 이론이 등장한 시기의 프로테스탄트 계열 국가들이 처한 상황을 살펴보면, 일단 가톨릭교회가 강력한 통치수단으로 활용했던 여러 조직들, 그 대표적 예로 종교재판소를 들 수 있는데, 이처럼 교회의 권위를 강요할 만한 강력한 통제기구(機構)가 프로테스탄트 계열의 국가에서는 상시적으로 운영되지 않았다. 게다가 프로테스탄트 계파의 다양함이 응집력을 떨어뜨려 태양중심설 추종자들에 대한 효과적인 공격을 어렵게 했을 뿐만 아니라, 종교전쟁의 발발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모두에게 반)교회 세력들을 향한 역량 있는 공격 가능성을 상당히 떨어뜨려 놓았다.
종교개혁 2세대에 속하는 칼뱅(Jean Calvin, 1509-1564)은 코페르니쿠스 가설에 대해 정확하게 어떤 식으로 이해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또 어떻게 언급했었는지에 대해 신학계는 여전히 활발한 논쟁을 벌이고 있는데, 대략 1556년으로 추정되는 시기에 있었던 칼뱅의 설교 내용에서 그 의중을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의 성경 묵상 고린도전서 제10~11장에 대한 여덟 번째 설교 내용을 통해 “그들(지구중심설을 주장하는 세력들을 지칭함)은 태양이 움직이지 않으며, 실제 움직이고 회전하는 것은 지구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정신을 살펴볼 때,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기에 우리는 그들을 거울로 삼아 하나님을 더욱 경외해야 합니다. 그들은 이처럼 자연의 질서를 바꾸려 하고 인간의 눈을 현혹시켜 모든 지각을 우둔하게 하려는 미친 자들입니다"라며 태양중심설의 등장에 대해 맹비난을 퍼부었다.
이 설교가 태양중심설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지는 않으며, 또한 코페르니쿠스를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칼뱅주의자들이 당시 확산되고 있던 태양중심설에 대해 어떤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충분히 가늠할 수 있게 해 준다. 이를 통해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을 겨냥한 가톨릭교회와 프로테스탄트교회 양쪽 모두의 공격적 태도는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
한편 오지안더가 작성한 서문이 어느 정도 효과를 발휘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코페르니쿠스 등장 이전에 가톨릭교회가 직면하고 있던 상황들에 대해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세 말기엔 각지에서 가톨릭교회에 도전하는 세력들이 우후죽순 솟아나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점차 글을 읽을 줄 아는 능력의 확산과 인쇄술의 발달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이 가톨릭교회 당국에게 점차 큰 위협이 되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교황청을 중심으로 한 교회 당국은 마구잡이식 순례, 지나친 성인 및 성유물 숭배, 면죄부의 남발 등 오히려 폐단의 싹을 더욱 키워 나가고만 있었다.
교황청은 동조를 거부하고 반발하는 세력들을 제압하기 위해 때로는 정치적 타협을 도모하기 하고, 때로는 대대적인 군사 공격을 감행했다. 신성 모독은 교황청의 권위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으로 간주하여 줄곧 강력하게 응징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코페르니쿠스의 '새로운 행성계의 제안'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그리 심각한 사안으로 인식하지 않았다는 점이 특이하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코페르니쿠스의 '새로운 행성계의 제안'이라는 것은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1543)보다 훨씬 앞선 1512년경에 작성되어 지인들 몇몇에게 배포된 코페르니쿠스의『짧은 주석(Commentariolus)에서부터 시작된다.
짧은 주석의 원제목은 천체의 운동을 그 배열로 설명하는 이론에 관한 주해서 (De Hypothesibus motuum coelestium a se constitutis commentariolus)」인데, 코페르니쿠스는 이 짧은 논문을 통해 알마게스트에서 언급하고 있는 '행성들의 등속 운동과 관련된 중심점이 따로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자신은 결코 동의할 수 없음을 밝히고 있다. 코페르니쿠스는 행성들의 겉보기 운동과 관련된 부조리를 해결하기 위해 행성들의 운동 중심을 지구에서 탈피하고자 했다. 이와 관련해 그는 짧은 주석』에서 “궤도 껍질 중의 하나가 태양을 중심에 두고 지구를 운행시키고 있다”고 설명했다. 사실 코페르니쿠스마저도 그 시대 대부분의 천문학자들과 마찬가지로 '행성들이 투명하고 단단한 수정구 형태를 띤 천구의 껍질에박혀 있다'라는 원칙에는 의심이 없었다. 그리고 태양을 중심에 둔 행성계를 구상하게 된 이유도 행성들의 천구가 수정구로 이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론을 따르게 되면 그 수정구들이서로 교차해야만 하는데, 물질의 형태를 띠고 있는 수정구들이 서로 교차하며 지나간다는 모순을 코페르니쿠스는 절대 받아들일 수가 없었기때문이었다.
우리가 코페르니쿠스에 대해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는데,코페르니쿠스도 프톨레마이오스와 마찬가지로 주전원 개념을 도입해자신의 행성계를 논증했다는 점이다. 프톨레마이오스는 80개의 주전원을 사용해 자신의 지구중심 행성계를 논증했다. 코페르니쿠스도 마찬가지로 짧은 주석에서 수성의 운동을 논증하기 위해 주전원을 포함해서 7개의 원운동을 사용했고, 금성은 5개, 지구는 3개, 달은 4개,화성, 목성, 토성은 각각 5개씩의 원운동을 사용함으로써 총 34개(태양을중심으로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이 공전하고 있는 원 6개, 지구를 중심으로 달이 공전하고 있는 원 1개, 그리고 각 행성들과 달의 여러 겉보기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된 주전원 27개를 모두 합한 수이다)의 원운동을 상정해 자신의 태양중심 행성계를 표현했다.
한편 아이러니하게도 교황청은 처음부터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의출판을 전혀 자신들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고 간주하질 않았는데, 오히려 여러 해 전부터 코페르니쿠스로 하여금 태양중심설과 관련된 그의 연구를 조속히 책으로 출판하도록 독려하고 있었다. 교황청의 이런 태도는 당시 위축된 가톨릭교회의 권위를 세우려는 수단으로 코페르니쿠스를 활용하겠다는 의도가 저변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코페르니쿠스는 '교황에게 바치는 헌정서'에서 자신이 연구한 것들은 교회의 권위를 바로 세울 목적으로 비롯되었음을 뚜렷하게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의 작업이 '오직 신의 전지전능함을 표현한 것'이라고만 여기지 않았던 가톨릭교회 한편에서 반(反)코페르니쿠스 세력이 고개를 들기도 했다. 1544년에 쓰여진 이래로 이탈리아 피렌체에 있는 수도원 도서관 선반에 오랫동안 보관되어 있던 톨로사니(Giovanni Maria Tolosani, 1470-1549)의 공식적인 반대 문건이 1975년에 발견되었다. 톨로사니는 신학적 지식과 천문학적 지식을 겸비했는데, 그는 맹목적 신앙심으로만 코페르니쿠스를 비판한 것이 아니었다.
톨로사니는 코페르니쿠스의 수학적 맹신은 물리학적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며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이 진정 올바르다는 것을 자신이 제안한 원칙에 따라 조목조목 논증하면서 코페르니쿠스 가설을 반박했다. 일부 반(反)코페르니쿠스 세력들의 저항이 상당히 논리적인 방식으로 시도되었을지라도, 신진천문학자들은 (갈릴레이가 종교재판에 서기 전까지) 한동안 특별한 위협을 당하지 않으면서 코페르니쿠스 시스템을 자신들의 연구 범주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한편 코페르니쿠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오지안더가 편집한(코페르니쿠스의 가설은 실제 현상들과는 다를 수 있다는 내용을 담은) 서문은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가 출판된 후, 뒤따를 수도 있는 거센 반향을 어찌 되었건 간에 한동안 면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이끌어내기 위해 오지안더가 서문을 일부러 조작했다고는 볼 수 없다. 당시 가톨릭교회 당국은 코페르니쿠스 시스템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코페르니쿠스의 작업 자체를 단지 창조주의 조화로움을 설명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만 간주했기 때문이다. 이런 환경 속에서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은 조금씩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양쪽 모두에게 새로운 패러다임의 등장을 예고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