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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9세기 천문학 교회의 반응

캠퍼고군2 2022. 4. 30. 23:20

처음부터 태양중심설과 기독교 세력과의 논쟁 요지는 지구, 태양, 행성들의 위치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사실적 물음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가 이제는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 즉 다시 말해 '인간 세계가 이젠 모든 만물의 중심이자 최우선이 될 수 없다는걸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과 그럴 수 없다는 것'의 대립이었다.

태양중심설의 등장은 단순히 천문학계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의 핵심은 태양중심설이 '세상의 모든 만물은 창조주의 사랑과 관심을 한몸에 받으며 지구 위에 살고 있는 인간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여겨 왔던 기독교의 정통 교리를 완전히 깨뜨리는 신성모독을 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만약 인간을 위해 이 우주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가정을 둠으로써 "우주의 존재 목적은 무엇인가?”, “창조주가 만든 우주의 존재 목적이 있기는 한 것인가?" 등과 같은 새로운 의문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연쇄반응은 작은 불씨가 되어 많은 사건들을 예고했다.

한편 코페르니쿠스 시스템을 보다 정교하게 만든 케플러는 누구 못지않은 독실한 프로테스탄트였는데, 그는 태양중심설을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방법으로 증명하는 것 자체가 그 어떤 것보다도 창조주의 섭리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라 믿었다. 케플러는 자신의 행성운동 제1, 2법칙을 1609년에 출판한 『신천문학(Astronomia Nova)』에 소개했는데, 이 책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칙과 종교적 심미주의 입각한 에'행성의 원궤도 운동'을 과감히 포기하고 있는 내용을 담고 있는 반면, 1619년 『우주의 조화(Harmonice mundi)』를 통해 발표한 행성운동 제3법칙은 다시 심미주의 회귀하는 것이었다. 로

코페르니쿠스와 케플러는 가톨릭교회나 프로테스탄트교회 당국으로부터 직접적인 제재를 당하거나 연구 활동이 구속받는 일은 없었으나, 고집이 강했으며 동료 학자들과 시비 붙기를 좋아하고 평소에도 교회 당국을 우습게 여겼던 갈릴레이는 전혀 다른 상황을 맞게 되었다.

갈릴레이가 종교재판에 회부되는 것을 기점으로 코페르니쿠스 시스템에 대한 교회 당국의 공식적인 제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갈릴레이에 대한 종교재판은 두 차례 있었는데, 두 번째였던 1633년 6월 22일의 분위기는 1616년 2월 26일에 있었던 사건보다 훨씬 더 위협적이었다. 결국 갈릴레이는 사망할 때까지 엄격한 감시와 통제를 받아야만 했다. 갈릴레이에 대한 여러 가지 위협적인 조치들이 발동됨으로써 교회 당국이 이젠 태양중심설을 상당히 위협적인 발상으로 간주하기 시작했음을 짐작하게 해 준다. 앞서 1600년에 가톨릭교회 당국이 지오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 1548-1600)를 이단으로 지목하여 민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불태워 죽인 사건은 교회 권위에 저항하는 것이 과연 어떤 결과를 불러올 수 있는지를 갈릴레이에게 확실히 알려 주는 것이었다.

브루노는 1584년에 자신의 저서 원인(原因), 원리(原理) 그리고 일자(一者)(De la causa, principio et uno)』를 통해 신과 우주가 하나의 통일성을 이루고 있음을 주장함으로써, 중세의 이원론적 세계관에서 철저히 분리되어 있던 신과 우주의 존재 관계를 냉철하게 부정했다. 그리고 같은 해에 발표한 『우주의 무한성과 세계(De l'infinito universo et mondi)』를 통해 신플라톤주의에 입각한 무한성의 개념을 도입하여 신만이 무한한 것이 아니고 우주 역시 무한하다고 역설했다. 이런 사상은 천문학에 있어 항성구의 위치가 무한하다는 개념으로 적용되었는데(항성들의 위치가 무한에 가까울 정도로 멀리 있기 때문에, 연주시차를 측정할 수 없다는 단서를 확보할 수 있음), 이러한 우주의 무한성은 곧 천체의 위치와 관련된 문제 해결에 반영되었다. 특히 그는 지구 이외에 또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고도 주장했다. 이런 파격적인 내용은 사실 여부에 관계없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가기에 충분했다.

교회 당국은 코페르니쿠스 시스템에 입각한 갈릴레이의 우주론이 기독교의 정통 교리를 확실하게 짓밟는 것임을 뒤늦게서야 깨달았다. 갈릴레이의 도발을 기점으로 가톨릭교회 당국은 상황을 완전히 다시 인식하게 되었다.

고전 천문학에 대한 갈릴레이의 공격은 뚜렷하면서도 명쾌했다. 첫째, 목성이 네 개의 위성을 가진다는 사실은 지구가 궁극적으로 모든 행성들의 운동 중심이 아니라는 것이었고, 목성이 하나의 계(系)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은 목성 자체가 또 다른 권위의 상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게다가 행성의 숫자는 반드시 일곱 개가 되어야 하며 그 숫자는 불변이라는 기본 원칙이 깨져 버림으로써 요한계시록의 내용과 아시아에 있는 일곱 개의 교회가 가지는 상징성은 산산이 깨지고 말았다. 그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행성이 딱 일곱 개여야만 하는 별의별 이유가 다 있었을 뿐더러, 그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

해석도 난무(亂舞)하고 있었던지라 교회 당국으로서는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결국 신학자들과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은 목성의 위성들이 환영(幻影)이라고 우기거나, 렌즈에 의한 착시현상일 뿐이라는 억지를 부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둘째, 금성의 위상이 망원경의 관측 내용처럼 변해 간다는 것은 기존 프톨레마이오스 시스템에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따라서 금성 위상(位相)의 정확한 발견은 코페르니쿠스 시스템이 이젠 가설이 아니라, 제대로 구색을 갖춘 이론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려 주는 것이었다. 셋째, 태양 표면에서 흑점이 발견됨으로써 완전무결한 것만을 창조하는 신의 권위를 얼룩지게 만들었는데, 교회 당국은 이것 역시 신성 모독으로 몰아가는 것 외에는 달리 뾰족한 방도를 찾지 못했다.

이런 상황이 좀 더 심각하게 진행되자 '신은 절대 헛된 일은 하지 않는다'는 기독교 정통 교리에 따라 행성들의 수가 7개를 넘어 버린 사실을 나름대로 합리화하기 위해 "다른 행성들에도 사람들이 살 수 있지 않겠는가?"라는 추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지구 이외에 또 다른 세상이 있을 것이라는 가정은 고대 그리스 천문학자 아낙시만드로스와 신플라톤주의자 브루노에 의해 이미 언급된 것이기도 했다. 이런 지경까지 이르게 되니 사람들의 관심은 "과연 다른 행성에 사는 사람들 역시 노아(Noah)로부터 유래한 자손이라고 볼 수 있는가?" 그리고 그들 역시 구세주를 통해 속죄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가톨릭교회 당국은 갈릴레이를 완전히 굴복시켜야겠다는 의도로 첫 종교재판에서 갈릴레이가 연구했던 태양중심설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철회하고 그와 관련된 내용을 절대 가르치지 않겠다는 서약을 강요했으며, 한편 대외적으로는 지구의 운동과 관련된 모든 서적들을 금서목록(禁書目錄)에 등재시켰다.

1632년에 출판된 두 개의 주요한 우주 체계에 관한 대화(Dialogo soprai due massimi sistemi del mondo, tolemaico ecopernicaon)』는 온 유럽으로부터 열광적인 호응을 받았으나, 정작 갈릴레이 개인에게 기다리고 있던 건 너무나도 위협적인 또 한 번의 종교재판이었다. 1616년에 있었던 종교재판의 서약 내용을 준수하지 않은 대가로 두 번째 재판에서 혹독한 고초를 치러야만 했던 갈릴레이는 죽을 때까지 감시와 통제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18세기에도 교회가 처한 상황은 크게 달라짐이 없었는데, 돌파구를 찾지 못한 교회 당국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모든 교육기관으로 하여금 코페르니쿠스 시스템을 참된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을 금지시켰다. 이러한 교회 당국의 저항은 19세기까지 이어지면서 '지구가 움직인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모든 서적들은 1835년에 이르기까지 금서목록에 등재되어 있었다. 그러나 태양중심설이 조금씩 자리잡혀감에 따라교회 당국의 이러한 대처는 더욱 가련한 지경으로 몰렸으며, 우스꽝스러운 저항 자체가 오히려 교회의 권위를 더 빠르게 실추시키는 결과를몰고 왔다.

갈릴레이 사건 이후 자연현상에 대한 과학자들의 가치관에 변화가생겼다. '변화'하는 것은 곧 자연의 법칙이라고 여겼고, '유별난 것이나재발하지 않는 현상'은 자연의 법칙이 아니라 신의 의지라고 간주하게되었다. 예로부터 유성과 혜성을 달 아래에 있는 공간에서 발생하는 대기 현상이라고 여겼던 신학자들은 특히 혜성의 출현을 곧 어떤 사건이발생할 것을 알려 주는 전조라 믿었다. 일찍이 루터가 혜성에 관해언급한 사례가 있는데, 그는 “이교도들이 혜성을 자연현상의 결과로 발생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결코 신은 확실한 재앙을 전조로 보여 주지않는 혜성을 창조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했다.

가톨릭교회나 프로테스탄트교회가 이토록 혜성에 관한 해석에 고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성직자들이 언제나 강조하며 가르치곤 했던교리(敎理), 즉 '천상 세계는 인간 세계와 모든 것이 다르며 부패한 인간들이 살고 있는 지상과는 절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숭고함이 깃든완전무결, 완전무변의 영역이다'라는 원칙을 끝까지 지켜내야만 했기때문이었다.

기독교가 출현한 이후로 모든 신도들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천상세계(天上世界)는 사후(死後)에 이르게 되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가톨릭교회는 프로테스탄트 세력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예전에 누렸던 영광과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보다 엄격한 교리 해석과 집행을 통해 가톨릭교회의 분열을 저지하고 조직의 결속력을 더욱 강화시켜야만 할 필요가있었기에 선망의 대상인 천상세계의 속성을 부정하는 태양중심설과 같은 이단(異端)에 대한 공격을 잠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이 소개된 이후, 티코, 케플러, 갈릴레이를 거치면서 신성(新星), 혜성(星), 목성의 위성), 금상의 위상(相),태양의 흑점 등 여러 현상들이 다시 해석되고 연구되자 교회 당국은 한꺼번에 물밀듯 몰려오는 반(反) 신앙적 공격들을 효율적으로 방어하지 못했다. 그들은 이런 위기를 내부 결속을 통해서만 극복하려 했다. 이러다 보니 코페르니쿠스 추종자들을 겨냥한 그들의 공격은 점차몽매주의기울어져 갔다. 갈릴레이의 사건이 발생한 지 359 년이 흐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Pope John Paul II) 시절인 1992년 10월 31일에 이르러 비로소 교황청이갈릴레이에 대한 복권(復權)을 발표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