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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플러(Johannes Kepler)

캠퍼고군2 2022. 5. 3. 12:50

케플러(Johannes Kepler)는 1571년 12월 27일 독일의 뷔르템베르크(Württemberg) 주(州)에 있는 바일 데어 슈타트(Weil der Stadt)라는 작은 도시의 독실한 루터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예전에 기사작위까지 받았으나, 궁핍한 살림살이로 인해 기술자 신분으로 전락한 경우였는데, 그의 할아버지는 바일 주(州)의 시장직에 선출되어 나름 명성을 떨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 하인리히(Heinrich)는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부부싸움을 곧잘 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케플러가 세살이 되기도 전에 용병이 되어 전쟁터를 누비고 다녔는데, 가끔씩 집에 들러 가족들을 못살게 굴다가 얼마 뒤 다시 먼 길을 떠나곤 했다. 케플러의 어머니인 카타리나(Katharina)는 모두 일곱 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그 중 세 명은 성인이 되기 전에 요절했다. 케플러의 부모들은 자녀들을 따뜻한 사랑과 정성으로 좋은 교육을 시켜 가문을 일으켜야겠다는 생각과는 전혀 동떨어진, 고집이 세고 이기적이며 가족에 대한 배려심마저 부족한 사람들이었다고 전해진다.

케플러(Johannes Kepler)


1584년, 케플러는 아델베르크(Adelberg)의 중등신학교(中等學校)에서 2년간 공부한 후, 1586년에는 마울브론(Maulbronn)의 시토 수도회의 수도원이면서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고등신학교에진학하여 2년을 더 공부했다. 이 학교들은 대학 진학을 준비하는 교육과정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학교생활은 매우 엄격하게 관리되었는데, 여름에는 오전 4시, 겨울에는 오전 5시부터 일과가 시작되었다.대부분 과목들은 라틴어로 강의가 이루어졌으며, 졸업을 위해서는 신학을 비롯해 그리스어, 수사학, 음악, 기하학 등 여러 과목들을 이수해야만했다.

1589년, 튀빙겐(Tübingen) 대학의 신학교에 입학하려던 케플러의 간절한 바람이 드디어 성사되었다. 케플러는 입학하면서부터 장학금을 받도록 되어 있긴 했으나, 손자의 학문적 열정을 기특하게 여긴 그의 할아버지가 학업을 보다 안정적으로 지속할 수 있도록 학교생활에 소요되는 비용을 따로 지원해 주었다. 케플러는 튀빙겐대학에서 다양한 소양 교육을 받았으나, 그 중에서도 특히 신학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당시 프로테스탄트 내부의 분열상에 대해 관심을 갖고 상당히 많은 고민을 했는데, 그 이유는 청년 케플러의 마음속엔 성직자가 되겠다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튀빙겐대학에서 수학과 천문학을가르치고 있던 미카엘 매스틀린(Michael Mastlin)을 만나면서 천문학에 입문하게 된다. 매스틀린은 티코와 서신을 통해 천문학에 대한 견해를 주고받기도 한 인물이었다. 케플러가 재학하던 시절의 튀빙겐대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자연철학과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을 기본 원칙으로 삼고 있었으나, 매스틀린은 코페르니쿠스 이론의 추종자였다. 케플러는 매스틀린을 통해 수학과 천문학을 제대로 배웠으며, 그를 통해 코페르니쿠스 추종 세력의 일원이 되었다.

튀빙겐대학에서는 기본 소양 과정 2년을 마치고, 신학 과정 3년을 하는 동안 통상 마지막 일 년 과정은 학생들 각자가 진로를 탐색하는 내용으로 학사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오스트리아 그라츠(Graz)의 프로테스탄트 신학교로부터 역사, 그리스어, 수학 등의 재능을 겸비한 교사를 한 명 보내 달라는 요청이 대학 당국으로 전해지게 된다. 이 때 케플러가 추천 대상이 되었다. 그는 너무 낯설고 먼 곳일뿐더러, 목사가 아닌 교사가 된다는 것이 영 탐탁지 않았지만, 가족들과의 상의 끝에 이것이 곧 신의 뜻이라며 받아들였다.

1594년, 당시 그라츠는 종교적으로 상당히 불안정한 지역이었다. 튀빙겐은 루터파 교도들만 거주하는 곳이었으나, 그라츠는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교도들 간의 내부 갈등이 상존하고 있던 도시였다. 1555년에 체결된 아우크스부르크 평화협정(Peace of Augsburg)은 통치자의 결정에 따라 그 영토 내의 주민들은 하나의 종교만을 선택해야 하며, 그에 반하고자 할 경우에는 자신의 종교적 신념과 일치하는 곳으로 이주해야만 했다. 그라츠를 통치하고 있던 집권 세력들은 가톨릭교도들이었으나, 그라츠를 비롯해 인근 여러 도시들의 몇몇 세력가들과 주민들 일부는 프로테스탄트였다.

부임한 첫해에 케플러의 천문학과 수학 강좌를 신청한 학생수는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 이듬해에는 그나마 강좌 개설을 할 수 있을 만큼의 수강 신청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학교 당국은 수사학, 베르길리우스의 시문학(詩學), 윤리학, 역사, 중급 산법(法) 등으로 케플러의 강의 주제를 바꾸도록 조치를 취했으며, 케플러는 그에 따랐다.

케플러는 학교 업무 외에 그라츠 지역의 행정 업무에도 관여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점성학 정보가 담긴 연감을 편찬하는 것이었다. 그 연감은 일 년 동안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지 사건들에 대한 정보가 담긴 것이었다. 케플러는 이런 일을 수행하면서 지역 인사들로부터 재능이 많은 수학자라는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1595년 7월, 케플러는 수업 중에 목성과 토성의 합(合)에 관한 위치를 작도(圖)를 통해 설명하던 중, 미묘한 규칙성을 발견하고 영감을 얻게 되면서 행성계 구조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다. 바로 이 시기에 케플러는 행성계 연구를 통해 우주를 창조한 신의 섭리를 규명해 보겠다는 강한 의지를 품게 되었다.

케플러는 다면체 이론을 행성들의 운동 궤도에 적용시키면서 플라톤의 완전 입체를 적절하게 조합하여 행성계 운동과 위치에 대한 규칙성을 추출하려 했다. 그러나 작업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고 앞뒤가 안 맞는 경우가 자꾸 발생하자 케플러는 매스틀린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신의 연구 과정을 소개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매스틀린은 케플러에게 많은 조언을 하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 둘은 코페르니쿠스 이론을 원칙으로 삼는다는 공감대가 오래 전부터 형성되어 있었다.

케플러의 아내 바바라 뮐러(Barbara Miller)는 공장을 경영하면서 지주이기도 했던 욥스트 뮐러(Jobst Muller)의 딸이었는데, 케플러와 바바라는 중매로 만났다. 혼사가 진행되는 동안 바바라의 아버지는 케플러의 소극적인 태도에 화가 치밀어 파혼해 버릴 결심을 했다. 그러자 케플러는 주변 사람들과 그 지역 교회 인사들의 입김을 빌리는 한편, 자신이 직접 결혼에 대한 강한 의지를 표명함으로써 위급한 사태를 진정시켰다. 바바라는 부유한 집안의 딸이기는 했지만, 이미 두 번이나 결혼한 경력이 있는데다 딸까지 하나 두고 있었다.

1597년 4월, 바바라는 세 번째 신랑으로 케플러를 맞이해 결혼식장에 들어섰다. 결혼식을 하고서도 케플러는 오랫동안 장인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케플러의 첫 아이는 태어난 지 겨우 두 달 만에 죽었는데,케플러에게는 무척 괴로운 사건이 아닐 수가 없었다.

1596년 12월, 페르디난트 2세(Ferdinand II)가 오스트리아 전역을 지배하게 되면서 종교 갈등은 조금씩 정치적 문제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결국 1598년 9월에 이르러 페르디난트 2세가 통치하는 모든 곳의 프로테스탄트 계열의 교회와 대학을 비롯한 교육 기관들은 폐쇄되었으며 관련 성직자들과 교사들 역시 추방되었다. 이제 프로테스탄트가 굳이 그라츠에 계속 머물겠다면 죽음을 각오한 경우라야만 가능했다. 하지만케플러는 그라츠의 시정(政)과 관련된 사업에 나름대로 공헌을 하고있었으며, 페르디난트 2세가 케플러의 과학적 재능을 전해 듣고 그라츠에 계속 체류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게 되는데, 문제는 이미 폐쇄된학교에서 케플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었다.

1599년 6월에 케플러의 두 번째 아이가 태어났는데, 그 아이 역시 태어난 지 35일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케플러 내외는 너무나 상심이 컸으며 그 충격은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가을이 되자 그라츠에 남아 있던 프로테스탄트가 다른 지역으로 이주할 경우, 어떤 재산도거래하거나 반출할 수 없다는 내용을 담은 칙령이 내려질 것이라는 소문까지 돌기 시작하면서 도시 전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듬해 케플러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루돌프 2세의 치하에서 대법관 직책을 맡고있던 호프만(Hoffmann)으로부터 티코를 소개시켜 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프라하로 올 수 있는 마차를 보내 주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받게 된다. 케플러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그라츠를 떠났다.

1600년 1월, 티코는 케플러가 프라하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아들과 사위 텡크나겔(Frans Tengnagel)을 보내 케플러를 데려 오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티코와 케플러는 베나트키 성에서 운명적 만남을 갖게 되었다. 티코가 케플러를 반갑게 맞이하긴 했으나, 당시 티코의 머릿속에는 벤섬에 두고 온 장비들을 옮겨오는 일에 모든 신경이 쏠려 있었던 터라, 티코에 대해 품었던 케플러의 기대는 곧장 실망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한편으로 티코는 1584년 벤섬을 방문해 여러 관측 자료들을 훔쳐 마치 자신의 업적으로 포장하여 책을 출판한 적이 있는 니콜라스 레이머스 바르(Nicholas Reymers Bar)를 칭송하는 편지를 본인에게 보낸 바가 있던 케플러를 무한히 신뢰할 수만은 없었다. 케플러 역시 함께 협력해 연구하자고 다독이면서 자신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는 것처럼 겉으로는 말하고 있지만, 시간이 흘러도 관측소의 기기들과 관측 자료들을 자유롭게 사용하고 열람할 수 있는 권한은 전혀 주지 않고 있는 티코의 태도가 영 못마땅했다. 그러다 케플러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르면 티코와 한바탕 격론을 벌이곤 했다.

당시 케플러는 경제적으로 궁핍한 상황에 처해 있었기에 어떻게든 안정된 생활과 수준 높은 연구 환경이 보장된 곳으로 이주할 목적으로 티코를 방문한 것이기는 했지만, 그것 말고도 1596년에 출판한 우주의 신비(Mysterium Cosmographicum)』에 대한 검토 작업과 향후 집필하게 될 책들에 이용될 수 있는 자료들을 충분히 제공받기 위한 목적을 함께 이루기 위해 식솔들을 데리고 그라츠를 떠날 결심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케플러는 자신이 계획한 것들이 하나씩 흐트러지게 되자 환멸(幻滅)을 느끼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케플러는 코페르니쿠스 행성계를 기본 틀로 삼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던 반면, 티코는 자신이 창안한 새로운 지구중심설에 뚜렷한 확신을 갖고 있었기에, 그 둘은 구조적인 문제에서부터 서로 어긋나 있었다. 티코는 자신의 연구 결과를 뒷받침해 줄 수학적 근거를 케플러가 마련해 주길 내심 바라고 있었으나,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보였다. 그래서 행성계 기본 틀에 관한 논쟁은 잦아졌다. 결국 케플러는 베나트키 성을 떠나 프라하로 가 버린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케플러가 사과하는 방식을 통해 베나트키 성으로 되돌아오고, 그 둘은 또다시 화해했다.

티코가 루돌프 2세에게 건의해 케플러가 보다 안정된 환경에서 연구에 집중할 수 있도록 재정적 지원을 확대해 주길 요청했고, 루돌프 2세는 그렇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상황이 이처럼 호전되자, 케플러는 자신의 가족들을 그라츠에서 베나트키 성으로 데려오고자 했다. 하지만 케플러가 가족들의 이주를 위해 그라츠에 도착했을 때, 어떻게든 그라츠에서 여건만 허락된다면 티코에게 다시는 돌아가지 않으려고 했다.

1600년 10월, 케플러는 티코에게 다시 돌아왔다. 이 때는 루돌프 2세의 요청으로 티코의 가족들이 프라하의 새 저택으로 옮겨온 상태였는데, 케플러의 가족들도 그 곳에서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또 다시 격한 대립을 반복했다. 어떻게 동상이몽으로 한 지붕 아래에서 다툼과 화해를 반복하며 상반된 연구를 진행할 수 있었는지 신기할 정도다.

1601 년 10월 13일, 초대받은 저녁 만찬에서 티코는 예의를 지키려다 큰 병을 얻고 말았다. 10월 24일 티코는 케플러에게 자신의 연구를 완성시켜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이틀 후, 케플러는 루돌프 2세의 비서로부터 자신이 궁정 수학자로 임명되었음을 통보 받게된다. 루돌프 2세는 자신의 이름을 딴 루돌프 행성표와 티코의 연구를 계승하겠다는 조건 아래 케플러를 후원하겠다는 제안을 내놓았다.케플러는 그 제안을 주저 없이 받아들였다. 루돌프 2세는 티코의 장비들과 자료들을 상당한 거금을 주고 구입하는 형태를 통해 케플러에게양도했다. 케플러는 티코의 장례식을 치른 후에 루돌프 황제의 거처 부근으로 가족들과 함께 이사를 했다. 이제 케플러는 티코의 첨단 장비와관측 자료들을 마음껏 활용할 수가 있게 되었다.

1604년 10월 11일, 케플러는 신성(新星)을 발견하고, 그 후 2년 동안관측 자료를 정리해서 『신성에 대하여(De Stella Nova)』라는 제목의 책을출판하여 루돌프 2세에게 헌정했다. 그 사이에 케플러는 아들 프리드리히 (Friedrich)를 얻게 된다.

티코가 남긴 화성의 관측 자료는 매우 정확하면서도 방대했는데, 케플러는 이를 토대로 행성의 운동 법칙을 발견하게 된다. 케플러는 행성들이 원궤도로 공전하는 것이 절대 아니며, 타원의 형태로 돌면서 근일점에서는 속도가 빨라지고, 원일점에서는 속도가 느려졌음을 발견했다.게다가 행성이 같은 기간에 태양을 하나의 초점으로 두고 타원 선상을쓸고 지나간 면적은 어디서든 모두 같게 나온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하지만 이런 연구 결과의 발표는 케플러가 티코의 관측 장비와 관측자료들을 마음껏 이용하여 연구할 수 있도록 하는 계약을 조인하는 과정에서 설정된 조건에 따라 티코의 사위이자 제자였던 텡크나겔의 승인을 받아야만 했다. 탱크나겔은 케플러의 연구 결과가 티코의 행성계를 부정하고 있었지만, 끝까지 승인을 거부할 수만은 없었다. 1609년, 케플러는 '행성이 타원 궤도로 공전하며, 같은 기간에 같은 면적을 쓸고 지나간다'는 새로운 행성 운동 법칙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신천문학』을 출판하게 된다. 이런 학문적 성과는 후원자였던 루돌프 2세가 '학문을 장려하는 훌륭한 군주'라는 명성을 널리 떨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루돌프 2세는 케플러에게 더욱 많은 후원을 해 주겠다고 약속했으나, 이번에는 곧장 실행되지 않았는데, 루돌프 2세는 그후 채 3년도 안 되어 1612년 1월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610년 3월 15일, 케플러는 친분이 있던 바커 폰 바켄펠스(Wackher von Wackenfels)로부터 이탈리아의 갈릴레이가 망원경을 통해 새로운 천체를 발견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케플러는 자신이 구상한 다면체 이론에 따른다면 행성이 분명 여섯 개만 존재할 것이라 믿었기 때문에, 새롭게 발견된 천체가 행성은 아닐 것이라 추정했다. 케플러는 루돌프 2세에게 전해진 갈릴레이의 항성의 전령(Sidereus Nuncius)』을 살펴본 후, 망원경을 통해 새롭게 발견된 네 개의 천체들이 목성의 위성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케플러는 자신이 '코페르니쿠스 행성계를 신봉한다는 것과 갈릴레이의 발견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내용을 담은 편지를 갈릴레이에게 보냈다. 4개월이 지난 후에야 갈릴레이의 답장이 도착했는데, 갈릴레이는 자신의 발견과 주장에 찬동해 주는 케플러에게 감사함을 전했다. 하지만 그 둘은 자신들의 연구 성과를 교환하며 각자 직면하고 있는 난제들의 해결을 위해 빈번하게 교류할 만큼의 관계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얼마 후 케플러는 갈릴레이가 개량한 망원경을 구할 수가 있었는데, 동료 학자들과 함께 목성을 관측하고 그 주위에 위성들이 공전하고 있음을 직접 확인했다. 그리고 그는 두 개의 렌즈를 색다른 방식으로 응용하여 상을 확대할 수 있는 법칙을 발견하고 그 내용을 정리한 굴절광학(Dioptrice)을 1611 년에 출판하게 된다.

원래 망원경은 안경 제조 기술자였던 네덜란드의 한스 리퍼쉐이(Hans Lippershey)에 의해 1608년에 발명되었다. 리퍼쉐이는 볼록렌즈와 오목렌즈를 일직선으로 맞추어서 사물을 볼 경우, 상이 확대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 두 렌즈를 통에 끼워 망원경이라는 것을 개발하게 되었다. 갈릴레이는 그 이듬해인 1609 년에 이를 개량하여 배율을 좀 더 높인 망원경을 만들었고, 그 후 케플러는 오목렌즈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오직 볼록렌즈 두 개만을 결합해 물체의 상하좌우가 바뀌어 도립상(立像)으로 보인다는 불편함을 지니긴 했으나 좀 더 넓은 면적을 볼 수 있는 망원경으로 다시 개량했다.

한편 1611년 7월 3일, 케플러의 아내 바바라는 열병에 감염된 환자들을 간호하는 봉사활동을 하다 전염이 되는 바람에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612년 5월, 케플러는 둘 다 열 살이 채 되지도 않은 자식 둘을 데리고 린츠로 이주했다. 그는 린츠에 도착하자마자 당장 자녀들의 양육 문제 때문에 재혼을 서둘러야만 했다. 주위에서 여러 여자들을 추천했는데, 결국 자신보다 스물네 살이 적고, 바바라와 결혼할 때 자신의 의붓딸이 되었던 레지나보다는 한 살이 많은 수잔나 로위팅커(Susanna Reuttinger)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다. 그녀는 신중하며 겸손하고 검소한데다 성실한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전해진다.

1613년 10월 30일에 케플러는 수잔나와 재혼했다. 이듬해 여름, 수잔나는 케플러의 여동생과 의붓딸의 이름을 하나씩 갖게 된 마가레테레지나(Margarethe Regina)를 낳았다.
1615 년 12월, 고향인 뷔르템베르크에서 케플러의 어머니 카타리나가 마녀로 몰리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 사건은 소송과 재판 문제로 케플러를 오랫동안 골치 아프게 했다. 그의 어머니는 이웃과 다툼이 잦았으며, 민간에서 돌고 있는 질병 퇴치법에 익숙해 의약품 및 향신료 등을 곧잘 만들어서 팔곤 했는데, 이게 주변 사람들과 관계가 원만하지 못할 경우에는 마녀로 몰리기 딱 좋은 조건들이었다. 다행히 케플러의 어머니는 투옥되고 혹독한 심문을 당하긴 했으나, 화형장으로 끌려가는 참변은 피할 수가 있었는데, 이는 케플러가 여러 인맥을 이용해 어머니의 구명 운동을 펼쳤기 때문이었다. 훗날 카타리나는 6년간의 지긋지긋한 재판 과정을 통해 혐의가 벗겨졌지만, 사건이 종결되고 그 이듬해 1622년 4월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617년, 케플러와 수잔나 사이에서 딸이 하나 더 태어났는데, 그 애는 자신의 할머니 이름인 카타리나를 세례명으로 받았다. 하지만 그 해 9월, 케플러와 수잔나 사이에 태어난 딸인 마가레테 레지나 그리고 케플러의 전처 바바라가 데려왔던 의붓딸 레지나가 함께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618 년 2월 9일, 작년에 태어났던 카타리나는 6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안타깝게도 이 때까지 케플러와 수잔나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은 모두 요절하고 말았다.

1619년 1월, 케플러와 수잔나 사이에 아들 세발트(Sebalt)가 태어났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1621년 1월에 수잔나는 코르둘라(Cordula)라고 이름을 짓게 된 딸을 낳았지만, 1623년 여름에 세발트를 잃고 말았다. 이처럼 자녀들의 비극적인 사건들을 통해 끊임없이 고통을 겪는 과정에서도 케플러는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1617 년, 케플러는 스코틀랜드 태생의 귀족 출신이며 독실한 프로테스탄트 계열의 수학자였던 존 네이피어(John Napier, 1550-1617)가 로그를 발견하고 그 성질을 규명해 1614 년에 출판했던 경이적인 로그 법칙의 기술(Mirifici Logarithmorum Canonis Descriptio)』을 접한 후, 그와 관련된 연구를 하고, 그 때까지 마무리 짓지 못하고 있던 루돌프 행성표』를 1624년에 드디어 완성했다. 하지만 자금 부족과 당시 종교분쟁에 따른 사회적 혼란으로 인해 이 책은 제때 출판되지 못했다.

태양중심설과 관련된 이론들 그리고 케플러 자신이 직접 밝혀 낸 법칙들이 참고서 양식으로 정리된『코페르니쿠스 천문학 요약(Epitome Astronomiae Copernicanae)』이 총 일곱 권의 시리즈로 1617년에서 1621년 사이에 출간되었다. 그 책들은 케플러 연구 초창기 때의 착상 코페르니쿠스 우주론, 전통 물리학 및 그와 관련된 형이상학, 천체 운동에 관한 수학적 논증 등으로 구성된 것이었다. 이 시리즈 책들이 출판되는 사이에 행성들의 거리가 특정 비율로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논증한 우주의 조화(Harmonices Mundi)』가 1619 년에 출판되었다. 우주의 조화는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안토니오 비발디 (Antonio Vivaldi)의 작품 발상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 작품이 바로 비발디의 바이올린 협주곡 작품 3의 6번 곡(Concerto Op. 3, No. 6)이다.

케플러의 『우주의 조화』를 살펴보면, 행성들의 운동으로부터 규칙성을 찾아내기 위해 음률 법칙을 적용시켜 논증하려 했음을 엿볼 수 있는데, 케플러는 악보의 여러 선상에 행성들을 조건화시켜 지정하는 방식을 통해 행성들 간의 거리 비율을 추출하려 했다. 결국 케플러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이러한 기법의 역사는 피타고라스가 활약했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을 앞서 지적한 바가 있다. 토성)의 천체들이 황도면과 동일한 면에서 각기 다른 지름과 주기를 가진 채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회전하고 있는 '타자성의 운동'으로 양분시켰다. 당연히 이 두 운동의 회전 방향은 서로 반대가 된다. 플라톤은 이두 가지 운동의 적절한 조화를 통해 천체들의 겉보기 현상을 설명하려했는데, 이것은 모두 우주혼의 작용에 의해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우주혼은 고대로부터 르네상스 시대까지 천문 현상들의 원인을 설명해 주는 도구로 여러 학자들에 의해 응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