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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르네상스 시대의 학자들은 왜 고전(古典)을 통해 진리를 찾으려 했는가?

캠퍼고군2 2022. 5. 4. 12:54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는 어떤 동기와 의도에서 출판하게 되었는가?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의 표지를 넘기면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바로 「서문」과 「교황 바오로 3세에게 바치는 헌정서」다. 당시 출판되던 책들의 대부분은 의례 저자가 서문에 자신의 집필 의도와 목적을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이 관행이었다(이런 점은 지금도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나름 능력을 인정받은 학자가 교황을 위한 헌정서를 따로 추가하기라도 한다면, 저자가 어떤 사상들을 기반으로 해서 연구에 임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자신의 책이 교회 당국뿐만 아니라, 기독교 세계관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를 교황에게 상세하게 고(告)하는 내용까지 포함하게 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의 서문은 코페르니쿠스의 의도에 상응하는 내용들이 완전하게 담기질 못했다.

천구


코페르니쿠스는 헌정서를 통해 교회의 연중 제례(祭禮)행사 때마다 골치를 썩이고 있던 달력 문제와 관련해 현재 수학자들이 태양과 달의 움직임에 대해 아직도 뚜렷한 확신을 갖고 있지 못할 뿐더러, ‘1년의 크기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조차도 제대로 증명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자신의 책은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그런 문제들의 해결에 분명히 큰 기여할 수 있을 것임을 교황에게 확실하게 설득시킴으로써 자신의 연구 가치를 인증 받으려 했다. 그리고 자신의 이러한 노력들은 분명히 신(神)에게 이를 수 있는 참된 길을 확실하게 열어 줄 것이라고 역설했다.

코페르니쿠스는 천문학에 조예가 없던 교황에게 당시 천문학계가 직면하고 있는 상황을 자세히 소개하면서, 그는 천문학자와 수학자들에 의해 당시까지 이룩한 연구 성과라고 할 만한 것은 고작 서로 맞지도 않는 손, 발, 머리, 팔다리를 억지로 끌어 모아 조합해 놓은 듯한 우스꽝스러운 '괴물 모습의 우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비판하고,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증명 과정에서 꼭 필요한 것들을 놓친다든지 아니면 전혀 상관도 없는 것들을 끌어들여 증명 과정에 끼어 넣는다든지 하는 과오를 지속적으로 범해 왔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덧붙여 그는 당시 천문학계가 직면한 여러 부조리들의 척결은 오직 지구의 원운동과 각 행성들의 운동 사이에서 발생하는 '상대적 겉보기 운동'과 관련된 해석을 통해서만이 가능한 것이라고 확실하게 못을 박았다.

코페르니쿠스는 이 같은 비판을 통해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자들의 형이상학적 논쟁으로부터 벗어난 이후의 천문학, 즉 어느 정도 수학적 체계가 잡힌 천문학이라는 것조차도 여전히 미흡한 수준에 불과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헌정서에서 교황은 여타 독자들까지 대표하는 상징적 인물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런 표현은 '교황에게 바치는 헌정서'라는 형식을 빌려 굳이 교회 당국과 불필요한 논쟁을 야기하지 않음과 동시에, 자신의 가설이 용인될 수 있는 범위의 것'이 되었음을 독자들에게 뚜렷이 확인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저변에 깔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코페르니쿠스는 '아첨꾼들의 모략에는 뾰족한 방법이 없다'는 격언을 소개하며 교황의 권위로 그런 자들(중상모략가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달라는 요청을 분명히 하는데, 앞서 언급한 바가 있는 '락탄티우스의 어리석은 행동'이 바로 그런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락탄티우스의 어리석은 행동'이란 수학자가 아닌 사람이 수학이나 과학적 가설에 대해 왈가왈부하면서 논쟁거리로 발전시킨 사례를 두고 하는 말이다.

중세 르네상스 시대의 학자들은 왜 고전(古典)을 통해 진리를 찾으려 했는가?

옛날 사람들은 '지혜(智慧)'라는 것이 새롭게 발견되는 것으로부터 획득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과거에 있었던 것들을 다시 찾아냄으로써 획득할 수 있는 것이라고 여겼다. 이런 사고방식은 다분히 종교적인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학자들은 일단 신이 창조한 최초의 인간인 아담이 이 세상 모든 것들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라는 가정을 세웠다. 이러한 가정의 근거는 창세기(記)」 제2장 19절~20절 (신께서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로부터 찾을 수 있다. 아담이 모든 것들의 이름을 지었으니, 그것들의 본성에 대해서도 당연히 잘 알고 있을 것이라는 논리로 이어진 것이다. 다시 말해 '지혜'란 아담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담과 이브가 신의 명령을 어김으로 인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는데, 이 때부터 인간은 타락한 존재가 되어 지혜의 상실이 시작되었다.

지혜의 상실은 한 순간에 일어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랜 시간에 걸쳐 조금씩 소멸되어 갔다. 인간의 지혜는 흘러간 시간에 비례해서 줄어들었다. 옛날 사람들이 가졌던 '지혜'에 대한 이런 접근법은 '고대 선조들이 후손들보다 인간이 타락하기 시작한 시점으로부터 상대적으로 더 가까운 시대에 살았기 때문에, 당연히 선조들이 후손들에 비해 훨씬 더 지혜로울 수밖에 없다'는 유추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이런 까닭으로 인해 중세 르네상스 시대의 학자들은 자신들의 연구와 관련된 여러 근거들을 고전)으로부터 찾으려 했다. 만약 자신이 수립한 가설이 고전에 없거나, 또는 전혀 반대되는 내용들만이 발견된다면, 그 가설은 분명 진리가 아니라고 간주되었다. 코페르니쿠스가 고전을 탐색하여 자신의 가설과 부합되는 선행 학자들의 이론들을 소개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